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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 신비로운 과학세계

[스크랩] 지렁이 - 흙의 창자

minjpm 2010. 7. 13. 13:40

간밤에 비가 억수로 내렸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새 아침에 날이 개고 화창하기 그지없다. 언뜻 창밖을 내다보니, 학교에 간다고 나서던 꼬마가 땅바닥에 엎드려 뭔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더니만 만지작거리기 시작한다. 뭘 하나 궁금하여 고개 숙여 본 어머니는 순간 질겁한다.

 

 

비 갠 날 땅바닥에서 볼 수 있는 지렁이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아들 녀석이 집게 손으로 자랑스럽게 끄집어 올리고 있지 않은가. 엄마는 느닷없이 아이의 등짝을 냅다 세차게 땅! 내려치곤, “이놈아, 더럽다” 하고 고함을 내지르며 서둘러 아이의 목 줄기를 낚아채 끌고 간다. 자못 머쓱해진 녀석은 지렁이에 미련이 남아 버텨보지만, 어머니 꾸중에 마지못해 끌려간다. 저럴 수 있나? 연약한 ‘과학의 싹’을 가꾸어 주는 현명한 어머니가 많아지길 바란다.

 

지렁이를 사투리로 거생이, 거시, 것깽이라고 하고, 한자로는 구인(蚯蚓)/지룡(地龍), 영어로는 earthworm(땅벌레)/night crawler(밤에 기어 다니는 녀석)라 부른다. 비 오면 마당에 기어 나오는 ‘붉은지렁이’(Lumbricus terrestris, 학명의 속명 Lumbricus는 ‘둥글고 길쭉한’, 종명인 terrestris는 ‘땅’이란 뜻임), 두엄더미 등에 떼지어 사는 꼬마 ‘줄지렁이’, 나무뿌리 근방에 사는 ‘회색지렁이’ 등이 있다. ‘지렁이’란 말은 어쩐지 뜨악한 느낌이 드는 수가 있으니 ‘지’는 땅이라는 뜻의 ’地’이고, ‘~렁이’는 구렁이, 능구렁이, 우렁이 등에 붙는 ‘~렁이’일 터다.

 

 

고리 모양의 마디를 가진 환형동물 지렁이

지렁이는 고리(環) 모양(形)을 한 여러 마디(체절)가 있어 갯지렁이, 거머리와 함께 환형동물(環形動物, annelida)이라고 부른다. 지렁이의 대표로 치는 ‘붉은지렁이’는 다 크면 보통 100~175개의 마디에 몸길이는 12~30 cm가 된다(열대 지방에는 심지어 4m 넘는 것도 있다 함). 그리고 지렁이에는 체색보다 좀 옅은 환대(環帶, clitellum)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둥그스름한 고리 띠 모양이며, 몸통의 약 1/3 지점(32~37번 체절 사이)에 있어서 환대에서 가까운 쪽 끝이 입이고 그 반대쪽이 항문이다. 환대는 생식에 관여하는 기관(나중에 알을 모아 넣는 고치를 만듦)으로 어릴 때는 없다가 성적으로 성숙하면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꼬마지렁이의 앞뒤 구별은 더더욱 어렵다.

 

지렁이 무리는 산언저리, 들판의 흙, 늪, 동굴, 해안, 물가 등 안 사는 곳이 없으며, 세계적으로 7,000여 종이 넘는다고 하며, 한국에는 ‘실지렁이’ 등 60여 종이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쉽게도 한국 지렁이의 연구가 생각보다 깊게 이뤄지지 않았다. 지렁이 몸마디마다 맨눈으로 보이지 않는, 8~12쌍이나 되는 까끌까끌하고 억센 강모(剛毛, 센털)가 뒤로 살짝 누워 있어서 땅바닥이나 흙 굴에 몸을 박기 쉽도록 할 뿐더러 몸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받쳐주기에 뒷걸음질을 하지 않는다. 지렁이/뱀이 그렇듯이 과학이라는 것도 늘 앞으로만 설설기어가지 뒤로 물러나지 않는 속성이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붉은지렁이, 환대가 보인다. 환대에 가까운 쪽이 입,
반대쪽이 항문이다. <출처: (cc) Michael Linnenbach>

 

 

‘흙의 창자’ 지렁이

대부분의 지렁이는 잡식성으로 흙 속의 세균(박테리아)이나 미생물(원생동물), 식물체의 부스러기와 동물의 배설물도 먹는다. 이런 유기물들은 지렁이 창자를 지나는 동안 흙과 함께 소화되며, 거무튀튀한 똥은 아주 좋은 거름이 되니 흙을 걸게 하는 더없이 유익한 놈이다. 집(땅굴)을 집느라 두더지처럼 여기저기 땅을 들쑤시고 다니기에 흙에 공기 흐름(통기)이 잘 일어나 식물의 뿌리호흡에도 그지없이 좋다. 하여 다윈은 흙 속의 지렁이 굴을 ‘흙의 창자(intestine of soil)’라 불렀다. 지렁이가 바글바글 들끓는 땅은 건강한 땅이요, 지렁이가 득실거리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땅이다. 그랬구나!

 

게다가 지렁이가 약 된다고 끓여 먹으니 토룡탕(土龍湯)이요, 지렁이를 찌고 볶아 가루를 내어 식용으로 가공한 식품도 이미 개발 중이라고도 한다. 그뿐만 아니다. 지렁이의 몸에서 혈전(血栓, 피가 응고하여 혈관을 막음)을 예방하는 약 성분을 뽑아낸다. 사람의 간에서는 피가 굳는 것을 예방하는 헤파린(heparin)이 늘 만들어지지만, 세월을 먹어 몸이 쇠약해지면서 그 기능이 부실해지므로 지렁이에서 뽑은 혈전예방용 약인 룸브리키나제(lumbrikinase)를 먹는 이도 늘어난다.

 

짝짓기하는 지렁이.
<출처: Jackhynes at en.wikipedia>

 

 

암수한몸이지만 짝짓기를 한다

지렁이는 예사로운 생물이 아니다. 지렁이는 암수한몸이라 몸에 정자를 만드는 정소(정집)와 난자를 형성하는 난소(알집)가 모두 있다. 그런데 지렁이는 제 난자와 정자가 자가수정(self-fertilization )하지 않고 반드시 다른 지렁이와 서로 정자를 맞바꾼다(영영 외톨이 신세인 때는 자가수정함). 사실 지렁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하등동물도 자웅동체(雌雄同體)지만 딴 놈과 짝짓기를 하는 타가수정(cross-fertilization)하며, 동물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식물도 자가수분(제꽃가루받이)을 피하니 이런 것을 자가불화합성(自家不和合性,self-incompatibility)이라 한다. 근친결혼을 하면 유전형질이 좋지 못한 자식을 낳는다는 것을 이들 지렁이나 식물에서 얼른 배워 터득하였으니 그것이 우생학(優生學)이다.

 

지렁이는 수많은 다른 생물의 먹이가 되어, 생태계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출처: (cc) HighInBC at Wikipedia>


지렁이가 따로 교미기가 있을 턱이 없다. 이윽고 가까스로 짝꿍을 만난 난소와 정소가 들어 있는 12~13 번째 체절(體節)이 맞닿게 서로 찰싹 달라붙는다. 짝짓기는 보통 한 시간 이어지는데 사랑이 워낙 거센지라 이때는 멀찍이서 손전등을 비추어도 꿈적 않는다. 이것들은 팔다리가 없으니 까칠한 강모와 끈끈한 점액이 굳어 붙으며, 정자가 몸뚱이에 나 있는 작은 홈을 타고가 상대의 생식구멍으로 들어간다. 급기야 난자와 정자가 수정하면 환대가 스르르 입 끝으로 움직인다. 수정란을 감싸면서 미끄러져 내려와 알주머니인 고치(cocoon)를 만들고, 기껏 1~2개의 수정란이 든 고치(난포)를 땅에 묻는다. 난포의 크기는 6 mm 정도이며, 2~3주 끝에 부화(孵化)하여 어린 새끼지렁이가 나온다. 지렁이는 주기적으로 짝짓기를 하여 1년에 열 개에서 수백 개의 알을 이따금씩 낳는다. 오래 사는 녀석은 6년을 넘게 산다고 한다. 장수는 지렁이로다!


지렁이를 잡아 접시에 넣어 먼발치에서 바라본다. 느닷없이 다들 접시 가장자리로 허둥지둥 꿈틀꿈틀(연동운동) 기어가 긴 몸통을 벽에 바싹 달라 붙인다. 당연히 야행성이라 어두운 쪽으로 몰린다. 당신은 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 쪽에 앉는가 아니면 창가로 들어가 어깻죽지를 차창에 쓰윽 기대는가? 어쨌거나 지렁이도 사람도 어딘가에 몸을 비스듬히 대려 드니 이런 행동을 ‘양성주촉성(陽性走觸性, positive thigmotaxis)’이라하고, 얄궂게도 지렁이와 사람이 가장 하등한 행동을 썩 빼닮았다!

 

 

지렁이가 없다면 생태계가 어떻게 되겠나

지렁이가 사람에게 득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지구의 생태계에서 피식자(被食者)로써 얼마나 긴요한 몫을 차지하는지 모른다. 이를테면 지렁이는 두더지, 새, 오소리, 고슴도치, 수달 말고도 셀 수 없이 많은 동물들의 먹이감이 되기에 하는 말이다. 그렇다, 나름대로 세상에 필요 없이 태어난 것이 없다 하듯이 옥(玉)같이 아리따운 지렁이가 없다면 자연생태계(먹이사슬)가 어떻게 되겠는가. 거생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힘 약한 사람도 얕보거나 업신여기지 말지어다! 다 나름대로 재능 하나씩은 갖고 태어나는 법.

 

 

 

권오길 / 강원대학교 생물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생물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로는 [생물의 죽살이], [꿈꾸는 달팽이], [인체 기행] 등이 있다. 한국 간행물 윤리상 저작상(2002), 대학민국 과학 문화상(2008) 등을 수상했다.

 

 

원문보기 : http://navercast.naver.com/science/biology/3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