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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어떤분이 쓰신 사후세계에대한 정리

minjpm 2009. 4. 30. 17:31

우주식의 세계

사물이 <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 식들이 모여서 의식을 형성한다는 사실에서 그치는 것이라면 나의 연구는 <식>을 인정하지 않던 이전의 상태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게된다. 왜냐하면 그 결과에 있어서 동일하므로 굳이 실체로서의 <식>이라는 불필요한 가정을 도입하는 일밖에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성된 의식은 소멸하지 않고 남아 있다’라는 지금까지의 추론 결과는 우리들의 사후 문제에 대한 해결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누구나 종교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종교의 교리들 - 기독교의 심판과 지옥과 천국, 그리고 불교의 윤회설과 업보 등 - 이 과연 사실인지 아닌지를 실험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믿기 어려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믿는다”라는 말의 의미는 “사실로 인정한다”라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소립자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아는 것은 이해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알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는 믿음이라는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노력이 필요 없다.
나는 지금까지의 추론 결과로서 감히 사후문제, 즉 <영혼>의 문제를 추리하고자 한다.

먼저 <사후식>, 즉 우리의 의식(영혼)이 사후에 어떻게 될까 하는 문제를 그 생각해 보자.
살아 있을 동안의 의식은 생명현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불교의 유식설에서 말하는 바, 전오식(前五識, 五感)과 의식, 생명현상과 의식을 연결시키는 말라식이 있다. 말라식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잠재의식>이라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식설에서는 그 외에 <아뢰야식(주; 아뢰야식은 아라야식, 아알라야식, 장식藏識 등으로 불린다)>이라 불리는 의식의 부분이 있다고 가르친다. 어떤 심리학 이론이나 학설에도 나오지 않는 이 <아뢰야식>은 무엇일까?
앞서 인간의 의식은 학습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다. 우리 의식은 내부 및 외부의 모든 정보를 처리한 결과를 다시 의식에 되 먹임(feedback)하여 의식의 정보 내용을 변경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학습>이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은 시간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그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 즉 정보는 “형태장”으로서 우리의 의식에 작용하게 된다. 결국 우리의 의식은 매 순간마다 항상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최종적, 현재의’ 의식의 장(場)이 바로 아뢰야 식일 것이다. 불교의 유식설에서는 내가 정의(생각)하는 아뢰야식에서 말라식을 제외한 것을 아뢰야식이라 하고 있지만, 말라식과 의식, 그리고 아뢰야식은 전체로서 하나인 의식(意識)의 다른 면모를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으므로 굳이 분리하든 통합적으로 파악하든 그 차이는 없을 것이다. 유식설에서 말라식을 분리하는 이유는 사후에 말라식 부분이 희미하게 지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사후에 말라식의 작용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추론이라 생각하므로 필자의 생각과 유식설의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
결론적으로 사후에 남게 되는 사후식은 한 인간의 평생의 의식의 작용과 형성의 결과요 결정체일 것이다. 이것이 가장 타당한 추론이다. 유식설에 의하면 윤회(輪廻)하는 것은 이 아뢰야식이다. 또한 아뢰야식은 의식과 말라식의 작용(활동)의 결과이면서 한편으로는 다시 의식과 말라식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식이다. 쉽게 말하자면 자신에게 영향을 미쳐서(feedback)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지능)의 학습능력이 이것이며,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이론의 기본 원리이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종자(種子;씨앗)식이라 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준에 의하면 우리의 현재의 의식도, 그리고 사후식도 곧 아뢰야식인 것이다.
불교에서 의식과 아뢰야식을 구분하는 것은 성리학(性理學)에서 이(理)와 정(情)을 구분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 생각되며, 또한 윤회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윤회하는 것이 의식이 이루어 낸 ‘종자식(아뢰야식)’이 아니라 의식 그 자체라면 우리는 전생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므로 의식 전(자)체가 윤회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막상 윤회설의 근거로서 숱하게 제시되고 있는 전생의 기억 사례는 - 예를 들어 최면상태에서의 - 오히려 우리의 의식 속에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의식과 아뢰야식을 구분하는 것은 그 자체에 약간의 문제점(모순)이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현생의 ‘나’, 즉 ‘나의 의식’은 전생의 ‘나’의 사후식이 형태창조장으로서 작용하여 형성된 ‘의식’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전생의 나’를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영향을 부분적인 기억의 형태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전생의 나’, 즉 나의 전생의 사후식은 하나의 형태창조장으로서 그대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나’의 ‘전생의 사후식’이 ‘나’와는 별개로 사후식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나는 무엇인가’ 하는 identity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진아>, 즉 ‘진정한 자신’은 없다. 변화(발전)하고 윤회하는 긴 과정에서 모든 존재(諸法)는 무상(無常)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로서 존재하는 것임을 이미 물리학과 정보의 개념을 통하여 알았다. 더구나 사후식의 세계에서 ‘나’라는 것은 전체 네트워크에 포함되어 있는 ‘나’이지, 독립된 존재로서의 ‘나’를 주장하거나 인정할 존재론적 근거는 그리 뚜렷하지가 않다. 아니, 실은 ‘전생의 나’와 ‘현생의 나’를 구분함으로서 우리는 ‘나’의 존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후식은 인간의 아뢰야식만이 아니라, 소립자들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여 `소산되고 형성된' 모든 식들을 다 포함할 것이다. 다른 생물은 물론 사물의 식과 인간의 의식을 차별할 근거는 전혀 없다. 식의 세계에는 태양과 지구, 모든 미생물의 식도 함께 있을 것이며, 수정란에서의 개체발생과 일본 원숭이의 학습 예와 글리세린의 결정화 현상, 체내 단백질의 특이한 뭉침 등이 보여주는 ꡒ형태창조식ꡓ도 있을 것이다. 이런 모든 의식들을 통 털어서 나는 <의식계>라 부르겠다.
이 생각은 물활론anmism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식의 수준에서 다소의 차이가 있다. 미생물 등의 저급한 식은 인간의 의식과 교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언어를 통하여 서로 교감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인간의 의식은 그 자체 내부에 언어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며, 아마도 의식들 사이의 정보전달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원활할 것이다. 사후식들이 의식계에서 사후식들끼리의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 생각의 근거이다.

< 홀로그램 우주 가설 >

근래 신과학 분야에서 초자연 현상의 해석을 위하여 홀로그래피 이론을 도입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사후식의 네트워크>라는 나의 가설과 상당히 유사하므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홀로그래피holography는 레이저 광선을 이용하여 입체 영상을 만드는 기술을 말한다. 하나의 광원에서 나온 레이저 광선을 반투명 거울을 통과시켜 2등분 한 다음, 절반을 피사체로 보내어 그 반사광을 필름으로 보내고, 다른 절반은 사진 필름으로 직접 보내면, 필름에서는 두 광선이 간섭한 결과로 생기는 복잡한 얼룩 같은 형태의 간섭 무늬가 찍히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나누어진 두 광선을 각각 피사체 및 필름에 도달하기 전에 확산 렌즈를 사용하여 광선을 펼쳐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피사체의 어떤 한 부분에서 반사된 광선이 필름 전체에 인화되는 것이다. 물론 인화될 때에 다른 절반의 광선(이것 역시 펼쳐져 있는 상태이다)과 간섭한 결과로 생기는 무늬가 인화 되게 된다.
이 필름에 다시 레이저 광선을 비추면 허공 중에 피사체의 입체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사진을 홀로그램hologram이라 한다. 그런데 필름의 한 부분만을 잘라서 거기에 광선을 비추어도 역시 전체 피사체의 모습이 나타난다. 물론 잘라낸 크기에 비례하여 상이 흐릿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쨋든, <부분에 전체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소립자의 식과 기> 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주는 하나의 통합체라는 가설과 유사해 보인다.
홀로그램 현상이 신과학에서 각광을 받게된 것은 스탠포드 대학의 신경 생리학자인 칼 프리브램 Karl Pribram이 두뇌의 기억 저장 방식이 이 현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이다. 즉 어떤 특정한 기억은 두뇌의 특정한 부분에만 기록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두뇌 전체에 저장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두뇌의 한 부분에 전체의 기억이 다 기록되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홀로그래피처럼 말이다.
프리브람의 생각은 물리학자 데이비드 보옴Bohm 의 초기 연구였던 플라스마 입자의 행태와 결부되어 더욱 굳어지게 된다. 플라즈마는 원자가 고에너지(온도) 상태에서 전자와 핵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 지구상에 있는 물질은 거의가 원자 상태이지만, 우주의 물질들은 실제로 거의가 플라즈마 상태에 있다. 봄은 플라즈마 입자들이 ꡐ서로의 위치와 운동상태를 알고 있는 것처럼ꡑ, ꡐ통합적으로ꡑ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화학 반응에서 벨루소프-자보틴스키 반응, 그리고 이와 유사한 ꡐ화학 시계ꡑ 현상 등에서 널리 찾아 볼 수가 있으며, 카오스 이론과 함께 전체(통합)주의자들의 논리에 사실적 근거가 되고 있다. (주; ꡐ화학 시계ꡑ 현상: 어떤 화학물질은 특정 조건하에서 매우 빠른 주기로 A라는 상태에서 B라는 상태로 변화한다. 이때 각 입자들은 제각기 다른 시간에 제멋대로 A에서 B로, B에서 A로 변할 것이라 생각되지만, 실제로 실험장치 내의 모든 입자들은 함께 A에서 B로, B에서 A로 변한다. 예를 들어 A의 빛깔이 빨강색이고 B는 파랑색이라면 순간적으로 전체의 색깔이 빨강색이 되었다가 다음 순간 파랑색으로, 다시 다음에는 빨강색으로 변한다. 마치 전 입자들이 마스게임이나 합창을 하는 것과 같다.)
마이클 탤보트Michael Talbot는 “홀로그램 우주, Holographic Universe, 정신세계사,(1999)”라는 책에서 우주 전체가 하나의 홀로그램이라는 가설을 주장한다. 이 가설은 봄의 ꡒ전 우주는 하나의 통합체ꡓ라는 가설과 그 이론적 근거가 매우 비슷하다. 여기에 의하면 우리의 개개의 의식은 전체 우주(또는 전 인류)의 의식의 홀로그램적 부분으로서, 전체의 정보가 담겨 있는 것이다. 물론 그 크기에 비례하는 만큼 ꡐ흐릿ꡑ하지만. 따라서 우리는 전생에서 죽던 때의 기억도, 현생에 태어나던 시점의 기억도 흐릿하게나마 가지고 있으며, 이런 현상들에 대한 많은 초심리학적 사례들을 홀로그램 가설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소위 ꡒ동시성ꡓ-- 서로 상관이 있어 보이지만 물리적으로는 관계가 없는 현상들이 우연히 동시에 일어 나는 것 ; 예를 들어 뉴턴이 미적분을 발견했을 때 거의 동시에 라이프니츠도 발견했던 일. 과학사에는 이런 사례들이 다수 있다 -- 이나 텔레파시 등의 현상도 우주가 ꡐ홀로그램적ꡑ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한다.
아쉽게도 <홀로그램 가설>은 여러 현상들이 홀로그램과 유사한 것으로 관찰된다는 사례들의 보고서일 뿐, 그 과학적인 근거는 아직 없다. 사실 이 생각은 <사후식의 네트워크>와 그 내용에서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이 홀로그램 가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논리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먼저, 홀로그래피는 이론적으로 잘 규명되어 있다. 홀로그래피는 헝가리 태생의 영국의 물리학자인 데니스 가보 Dennis Gabor(1900~1979)가 1948년에 개발한 기술이며, 가보는 이 발명으로 1971년에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이 기술은 파동에 대한 푸리에 J. Fourier의 해석 기법을 이용한 것으로서, 그 내용상 달리 확대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조금도 없다. 피사체의 어떤 한 부분에서 반사된 광선이 필름(필름) 전체에 도달하여 인화되므로, 필름의 모든 부분에 피사체 전체의 정보(영상)가 고루 조금씩 담겨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홀로그래피 현상을 신비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두뇌의 기억 방식은 홀로그램 필름처럼 전체적인 정보가 고르게 나누어져서 각 부분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는 기억 정보가 각 요소별로 나누어져서 두뇌의 여러 부분에 저장되는 것이다. 최근의 연구보고에 의하면 뇌는 미소한 크기의 모듈 module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모듈 별로 담당 임무가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 대한 기억이 그 얼굴 생김새를 기억하는 모듈, 목소리를 기억하는 모듈, 대화 내용을 기억하는 모듈 등에 나누어져서 기록 저장되며, 이 모듈들은 인터넷처럼 네트워크 방식으로 연결된다. 다음에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되살릴 때에는 해당 모듈들의 네트워크가 서로 연결하여 전체적인 기억을 살려 내는 것이다. 두뇌의 기억 방식은 홀로그램적이 아니다.
<소립자의 식과 기> 편에서 말씀드렸던 데이비드 봄의 <하나의 통합체로서의 우주>도 홀로그램과 그 겉보기는 비슷하지만, 기본 이론면에서 차이가 있다. <하나의 우주>에서는 각 소립자들이 전체 우주의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서 소립자 A가 B와 작용하고, 다음에 B가 C와 작용했다면 A는 C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A 또는 C가 관측에 의해서 확정될 때(확실한 정보를 가지게 될 때)에 B를 통해서 그 정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분에 전체의 정보가 있다>라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식(의식, 사후식)들은 홀로그래피 방식이 아니라 네트워크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사후식의 네트워크>는 어떤 것일까?

그런 네트워크가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터넷과 우리의 뇌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인터넷은 전세계적으로 떨어져 있는 수백 만대의 컴퓨터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뇌는 백 억 단위의 세포들이 서로 입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세포의 연결점을 시냅스라 하는데, 하나의 뇌 세포가 다른 세포와 연결되는 시냅스의 숫자는 수천 개나 된다. 즉 각각의 뇌 세포는 수천 개의 다른 세포와 입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의 단위이다. 그리고 하나의 세포는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수천 개의 세포들을 통하여 다시 다른 세포들이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다른 세포들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네트워크 체제를 갖춤으로서 우리의 뇌는 그처럼 놀라운 지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사후식의 네트워크도 뇌 세포들의 그것과 같은 체계일 것이다. 보다 더 효율적인 체계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 정도의 추측이 온당하리라. 사후식의 숫자가 몇백 억 개라 한들 기로서 서로 교감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동물의 사후식은 설사 인간의 사후식과 연결되더라도 교감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인터넷을 통하더라도 우리의 정보 수용(인식)능력의 제한에 의한 접촉 범위의 한계가 있듯이, 사후식도 네트워크에서 교감(정보 교환)할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특히 언어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적으로 살아 있는 우리는 언어를 달리하는 다른 의식체와의 정보교환이 불가능하다. 의식의 정보는 언어라는 매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적 생명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의식, 즉 사후식의 정보 교환 방식은 좀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언어는 다르지만 우리 의식의 작용 기전mechanism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다. 그러므로 언어라는 매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후식들의 정보교환은 보다 원활하고 넓은 범위에서 작용 가능할 것이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에는 약간의 보완이 필요하다. 많은 언어학자, 철학자,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사고, 즉 의식의 작용은 상당 부분 언어에 의존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언어는 단순한 정보 교환의 도구가 아니라, ‘사고의 도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라고까지 말한다. 우리의 사고가 언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후식들의 정보 교환 -- 그 접촉 범위에 있어서 아무래도 언어가 다소의 장애가 될 것이라 판단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기적(氣的)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동기 감응(同氣 感應)>의 현상이 있다. 기는 동일한 종류, 성향의 기들끼리 상호 교감이 더 쉽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사후식의 세계에서도 우리 한반도에서 살다 간 식들, 즉 우리 조상의 식들끼리 더 밀접한 네트워킹이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사후식이 모여서 구축한 네트워크의 능력은 나로서는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냥 인간 정도의 수준일 수도 있을 것이고, 더하기 혹은 상승작용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능력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수준을 추측해 보기 위해서 인간의식의 형성과 비교해 보면, 소립자들이 모여서 생명을 탄생시키고 다시 진화시켜서 인간의 의식을 만들어 내기까지는 수십 억 년이란 세월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시간에 있어서는 사후식에 있어서도 같은 시간이 걸렸으므로 사후식의 네트워크가 자기조직화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식과 식 사이의 교감이 가장 쉽고 예민하다는 사실도 네트워크의 가능성과 수준(효율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생물체의 조직은 말씀드린 것처럼 복잡하고 정교하다. 사후식의 네트워크와 생물의 조직을 비교하면 어떨까? 사후식의 네트워크도 그만큼 조직적이고 효율적일 수 있을까?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로서 사후식의 네트워크와 가장 비슷한 인간의 뇌 조직을 보면 개별 뇌 신경세포(뉴런)들이 축색과 시냅스를 통하여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 네트워크 전체 즉 두뇌는 개별 뉴런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의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후식들이 네트워킹의 통로 또는 회로로서 사용하는 것은 당연히 <기>다. 그러므로 <기>와 시냅스의 성능을 비교해보면 사후식의 네트워크 수준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냅스는 하나의 뉴런에서 수천 개가 나올 수 있다. 즉 하나의 뇌 세포는 수천 개의 다른 세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백 수십 억 개의 뇌 세포가 각각 수천개씩의 다른 세포들과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를 상상해 보라! 그래서 인터넷처럼 일부의 연결회로가 끊기더라도 다른 회로를 통해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인터넷이 생긴 동기가 전쟁시에 컴퓨터의 네트워크 일부가 파괴당하더라도 전체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대비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다. 사후식에서 기가 나오는 것이 어떠한지--시냅스나 인터넷 연결망처럼 병렬(竝列)인지 아니면 단선(單線)적인지--를 추측할 수 있는 방법은 생시에 의식에서 기가 나오는 것을 검토해 봄으로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컴퓨터의 성능은 APPLE의 8bit로부터 XT의 16bit, 386, 486AT의 32bit를 거쳐 펜티엄의 64bit로 향상되어 왔는데, 여기서 <bit>는 CPU에서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입출력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다. CPU에는 해당 bit 숫자만큼씩의 입출력 단자가 있어서, 펜티엄의 경우에는 64개의 입력이 동시에 처리되고 출력된다. 이에 비해서 모뎀은 사용할 수 있는 회로가 전화선 한 가닥뿐이므로 1 bit 장치이다. PC 통신의 속도가 컴퓨터 자체에 비해서 매우 느린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MODEM(modulator-demodulator)은 이름처럼 16 내지 64 bit의 출력 데이터를 1 bit로 변환시키고, 1 bit의 입력 데이터를 다시 16 내지 64 bit의 CPU용 데이터로 변환시키는 장치이다. 우리의 의식을 컴퓨터의 CPU에 비교한다면 몇 bit나 될까? 이에 대한 대답은 뇌 신경생리학자도 심리학자도 아닌 나로서는 어렵지만, 의식은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을 병렬적으로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살아 있는 동안의 의식이 동시에(병렬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 숫자는 5 bit가 정도가 아닐까 추측한다. 이것은 우리의 감각 기관이 다섯 가지라는 점에서 유추한 것이다. 물론 상당한 오차가 있을 것이지만, 전체 네트워크의 성능을 짐작하기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사후식은 한 번에 하나의 다른 식과 교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후식의 네트워크의 성능이 최대로 발휘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진화의 속도가 느리다는 점과, 그리고 업보의 작용이 느린 것 등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 해준다.
이런 추측과는 다른 관점에서, 사후식의 네트워크가 보다 훌륭한 성능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근거도 생각할 수 있다. 시간이 충분하다는 점과, 자기조직화에 의해서 창발(創發)되는 전체적인 성능은 그 구성단위에 비해서 매우 뛰어나다는 점이다. 뇌 세포의 자기조직의 결과인 의식은 뇌 세포 하나 하나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다. 카오스 이론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복잡한 것에서 생겨난 조직'은 그 구성단위의 성질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다른 고차적인 성질과 기능을 가진다. 네트워크는 물론 가장 잘 짜여진 `조직'인 것이다. 그리고 뇌 세포 하나 하나는 각각 수천 개의 다른 세포들과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으며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는 사실도 한 근거이다.
그러므로 사후식의 네트워크는 개별식보다 훨씬 우수하며, 개별식이 가지지 못하는 더 높은 <무엇>-상상하기도 어렵지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후식의 네트워크는 <신>의 수준일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진화와 업보의 속도 문제는 다른 것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인데, 생각해볼 수 있는 이유는 물론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DNA 수술에 사용되는 <기>는 외과용 메스처럼 날카롭지 않아서 정밀한 조작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 업보는 사후식의 발전을 위한 보조수단일 것이라는 점(뒤에 다시 검토하겠다)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를 통해서 나는 나름대로 사후식의 네트워크는 <신>의 수준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까울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일반적인 개념에서의 신,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의 `전지전능한 조물주'와는 다를 것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전지전능'이라는 표현은 논리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신이 시공간 내적 존재인가 외적 존재인가 하는 문제, 결정론, 악의 존재 등은 `인간이 신에게 전지전능할 것을 요구'한 때문이며, 나는 유아기부터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고 자라났지만 <전지전능한 창조신>의 논리적 모순을 납득할 수 없어서 그 신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사후식의 네트워크는 개별 사후식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일 것이라는 판단은 매우 타당해 보이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 나는 사후식의 네트워크를 <우주식>이라 부르겠다. <이차크 벤토프>는 그의 저서 <우주심과 정신물리학(정신세계사, 류시화, 이상무 역)>에서 <우주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우주심은 모든 의식이 하나로 합쳐진 것을 말하므로, 개별의 의식들이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우주식과는 다른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후식들끼리의 교감은 <정보의 교환>을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거시계(巨視界)에 있어서 정보의 교환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적용되므로 에너지소모를 수반한다. 예를 들어서 모뎀을 통하여 데이터를 주고받을 때에는 컴퓨터의 전원이 없이는 안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거시계가 아닌 소립자 단위의 미시계(微視界에서) 서로 교감(交感)하는 과정에는 에너지가 필요치 않다. 하나의 전자가 다른 전자를 만날 때에 서로 밀쳐내지만, 즉 상호작용(교감)하지만 에너지의 소모는 없는 것이다. 프레드킨의 <우주컴퓨터>, IBM의 베네트와 랜다우어 등이 증명한 에너지 소모 없는 컴퓨터 등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 물리학자 작크 사르패티는 <벨의 정리>와 그 실험결과가 보여주는 정보의 초광속 전달 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론을 제시하였다.
“입자들은 공간유사(空間類似; space-like)로 분리되어 있고 아울러 연관되어 있지만, 그 입자들이 신호로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입자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밀접하고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르패티는 이 이론을 <신호가 없이 이루어지는 부(負)의 엔트로피(negentropy, 정보)의 초광속 전달(이동)>이라 정의하였으며, 이 가설을 바탕으로 여러 이론들을 유도, 주장하였다. 이 이론에 의하면 그러한 형태로 전달되는 정보과정은 마이너스(부) 엔트로피 과정이므로, 에너지의 소모를 수반하지 않는다. 서로 떨어진 두 지점(물체) 사이에는 에너지의 전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보가 전달될 때와 동일한 결과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후식의 세계에서의 정보 교환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비록 미소하지만 약간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보는 ‘관계’라는 개념을 통하여 정의할 수 있으며,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의해서 모든 상호작용에는 엔트로피의 증가, 즉 ‘관계’의 변화가 따르게 되며, ‘관계'의 변화는 열역학적으로 ’에너지의 유용함의 감소‘를 수반하는 것이라 말씀드렸다. 정보 처리 과정(information process)은 분명히 엔트로피 법칙의 적용을 받는다. 이것은 섀넌이 수학적으로 증명하여 현대의 정보(통신) 이론의 기본 개념이 되어 있다. 우리는 <엔트로피와 정보, 그리고 식> 편에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에너지)보존의 법칙에 대입하여 확장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의 공식을 얻었다.

<유효 에너지, 질서, 정보의 감소> = <식의 형성>

그런데, 만약 위의 공식이 참이라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법칙’으로서의 그 지위를 잃게 된다. 부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에딩턴의 말처럼 “우주적인 법칙”이다. 그것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록 거시계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우주의 모든 현상에 그 법칙이 적용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해석하는 다른 관점은 우주의 모든 변화에는 방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엔트로피의 증가 방향을 시간의 방향으로 삼고 있는 과학자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법칙을 식의 상호작용 -- 정보 교환, 즉 <기>의 작용에 적용할 수 있는 법칙으로 확장하고자 한다.

<‘기’를 통한 사후식의 정보교환은 엔트로피 법칙의 적용 대상이다>

다시 말하면 식의 정보 교환, 즉 ‘기’도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작용이라는 것이다. 정보는 ‘영향력을 가할 수 있는 것’이라 정의했었다. ‘영향력’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 작용을 말한다. ‘변화’는 ‘관계의 변화’로서, 이것을 대상으로 하는 법칙이 바로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후식일지라도 ‘기’에 의한 상호작용으로 어떤 결과적인 변화, 즉 ‘유효한’ 정보를 얻으려면 역시 그 변화를 만드는 데에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엔트로피의 법칙을 폐기처분하지 않는 한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필자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필자는 <정보의 교환>과 <정보에 의한 변화>를 별도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정보의 ‘교환’에는 에너지의 소모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양자역학적 사실에 의하여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변화’는 분명한 엔트로피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사후식의 네트워크에서의 정보교환과 변화(작용)가 에너지의 소모를 필요로 한다 하더라도 그 소모량은 매우 작을 것이다. 앞에서 길게 말씀드린 것처럼 정보과정information process은 에너지 의존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리만 다이슨은 저서 “무한한 다양성을 위하여 Infinite in All Directions"에서 지구 사회 전체의 정보교환을 ‘영구히’ 유지하는데 필요한 에너지 양은 태양이 지구를 8 시간 동안 비추는 양에 불과하다는 계산을 제시한다.
그러나 ‘변화’를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만약 사후식이 기적(氣的)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사후식과 그 네트워크는 그 자체로서 진화해 나갈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하다면 사후식의 세계는 단독적으로 자가 발전(發展)하는, 생명계와는 별개의 존재(세계)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도 매우 짧은 시간 내에 말이다.
이처럼 식의 정보교환, 즉 ‘기’의 작용에 필요한 에너지는 제로이거나 제로에 가까운 미소한 양이라서 그 실재 여부를 판단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필자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서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필자는 물리법칙에 벗어 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아직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법칙), 어긋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후식의 세계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세계라면 그 에너지를 무엇에서 공급받는가? 하는 문제가 따른다. 그 세계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은 세계’와 조금도 다름없다. 변화가 없는 세계는 죽은 세계이다. 그렇다면 사후식의 세계는 어디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을까? 아니, 먼저 사후식의 세계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는 어떤 종류의 에너지일까? 당연히 그것은 <정보>, 즉 <기>이다. (인테 내에서 느낄 수 있는 소위 “기 에너지”와는 다른 것이다. 그 차이점에 유의하시라).
기공사(氣功師)들이 기를 방사(放射)하는 일을 생각해 보자. 기를 방사하는 사람은 생체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기를 보낸다. 이 사람에게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기를 받는 사람은 에너지의 소모 없이 기, 즉 정보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을 생명계의 의식이 방사하는 기가 사후식에 전달되는 일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후식의 세계는 생명계로부터 기를 받아서 유지되고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서 나는 살아 있는 우리의 의식은 사후식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무당의 신내림, 귀신의 빙의(憑依) 등의 현상을 통해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후식의 세계와 쉽게 접속할 수 없는 것일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생명체는 생명의 유지를 위해서 불교의 유식설에서 말하는 말라식이라는 단단한 보호막으로 감싸여져 있다. 선, 수도, 명상 등은 말라식의 벽을 깨기 위한 것이라 한다. 고승(高僧), 훌륭한 선사(禪師), 명상 수도자들은 이러한 경지에 도달했을 때 사후식의 세계와 접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후식의 네트워크가 에너지를 받는 길은 살아 있는 의식으로부터 기를 통하여 받는 방법뿐일 것이다. 살아 있는 의식은 육체(두뇌)라는 동력원을 가지고 있다. 여러 종교에서 예배(예불)를 올리고 조상(신)에게 제사를 모시며 굿을 하고 치성을 드리는 일들이 아마도 살아 있는 의식이 사후식(개별식 또는 네트워크)에게 기로서 정보(에너지)를 전달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하면 사후식(네트워크)도 의식(인간)에게 영향(보답)을 줄 수 있는 에너지를 받는 것이리라. 이처럼 여러 종교의 교리를 두고 생각해 보면 우주식이 종교에서 말하는 ꡒ신ꡓ일 가능성이 많다.
자기조직화한 우주식은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의지는 소립자의 단순한 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이다. 따라서 그 `의지'는 스스로 자신과 네트워크 전체의 수준을 향상시키려는 쪽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소립자가 생명을 만들 듯이 말이다. 말씀드린 대로 나는 우주식의 이 의지야말로 우주의 근본 성질이요 법칙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추측이나 `믿음'이 아니라 <진화와 기>에서 그 근거를 말씀드렸던 것이다.
<생물의 진화>에서 `왜 생물은 진화하려는 것일까?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라면 인간보다는 박테리아 정도가 더 유리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던 바, 그 대답을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주식이 생물의 진화에 개입하고 기여하는 이유도 설명된다.
<진화와 기>에서 `진화의 결과는 발전된 의식의 형성'이며, 그 이외의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우주는 전체 우주의 의식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물리적, 생명적, 의식적 현상들이 그 과정에 일치하고 있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이 주장한 ꡒ숨겨진 질서(법칙) implicated odrerꡓ, 라이얼 왓슨이 말하는 ꡒ생명 조류 Lifetide"가 이것이며 폴 데이비스가 찾으려는 ꡓ우주의 청사진 The Cosmic Blueprintꡒ이 바로 이것이다. 폴 데이비스는 카오스 계의 자기조직화 이론으로 생명의 탄생과 진화를 비롯한 모든 우주적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신비적인 것'의 가정에 엄격히 반대하는 물리학자로서, 그의 생각이 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ꡓ우주의 청사진ꡒ을 다음 글로써 끝맺음하고 있다.;

ꡒ나는 물리학 법칙들을 보완하는 데 필요한, 조직하는 원리들이 자연 속에서 복잡성을 보는 새로운 방법들과 연구를 위한 새로운 접근 방법의 결과로서 장차 나타날 것 같다고 열심히 주장해 왔다. 나는 과학이, 원리적으로 인간의 의식을 포함하는 모든 수준에서 그러나 단지 `더 높은 수준'의 법칙들을 포용함으로서 복잡성과 조직화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믿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멋진 창조적 우주 속에서 신, 즉 목적을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는다. 우주가 창조적이며, 법칙들이 복잡한 구조를 나타내고 의식의 시점까지 발달하도록 허용했다는--바꿔 말해 우주가 자신의 자체 인식을 조직했다는--바로 그 사실이 내게는 그 모든 것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로 보인다. 설계의 느낌은 압도적이다. 과학이 우주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모든 과정들을 설명할지도 모르겠으나, 존재 뒤에 숨겨진 의미가 있을 여지를 여전히 남길 것이다ꡒ.

반복하지만, 생명의 탄생과 진화, 그리고 그에 따른 의식의 발전은 <식>의 자기조직에 의한 발전이 그 원인이며 결과이며 목적인 것이다. 우주는 `하나의 통합체'로서 `자신의 자체 인식을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 칼 융 Carl Jung이 주장한 <집단 무의식>은 우주식이 우리 의식에 미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의식은 사후(전생의)에 우주식과 접속되어 있으면서, 생시에는 우주식의 기를 통하여 그 영향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 <영향>이 바로 집단무의식이다.

ꡒ인간의 마음은 진화에 의해서 이미 모두 틀 지어져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각기 그 자신의 과거사에 깊이 연계되어 있다. 단순히 유아기의 그것만이 아닌 그 자신의 종과 관련된 보다 중요한 과거사에, 그것은 이전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유기적 진화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ꡓ.
ꡒ우리 개개인의 심리는, 말하자면 집단적 심리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바다 위의 보잘것없는 잔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인생을, 세계를, 나아가 역사를 근본적으로 틀 지어 가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집단적 심리이다. 그것은 의식과 달리 나름대로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ꡓ

나는 융의 이 말에 굳이 설명을 추가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사후식은 에너지원이 없으므로 그냥은 자신을 향상시킬 수 없다. 에너지를 공급받는 길은 생명을 통하는 방법뿐이다. 따라서 사후식은 `인연이 될 때' 물질계로 윤회하게 되고, 살아 있는 동안 스스로를 향상시킨(비유하자면 에너지를 공급받은) 다음 우주식으로 돌아가서 전체 네트워크에 자신이 향상된 만큼을 기여할 것이다(여기서 의식의 에너지는 소립자들로부터 나오는 식을 말한다. 물리적인 에너지가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의 의식은 끊임없이 외부의 입력과 스스로의 판단, 그리고 의지에 의한 행동으로 자신을 키워 나간다. 이 과정에서는 물리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며, 그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우리의 육체 즉 생명이다.
물질계 즉 생명계는 우주식의 유지와 향상을 위해서 이처럼 소중한 곳이다. 아니, 물질계와 우주식은 서로 상보적인 관계로서 전체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생명계가 이처럼 소중한 곳인 바, 생명계를 어지럽히는 행동은 우주식을 해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어떤 의식이 사후에 사후식이 되어서 그 네트워크에 접속될 때에 그 사후식이 저질의 것 -- 예를 들어서 김일성 같은 악인의 것 -- 이라면 네트워크 전체의 수준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네트워크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을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지옥이 바로 그것이리라. 인간이 마음 본 바탕에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이것으로 설명된다. 그렇지 않다면 즉 사후세계가 문제되지 않는다면 사랑이나 자비 `따위'는 자신에게 손해가 될 뿐이다. 그러함에도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의 마음속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공통적으로 선한 부분이 있다는 것은 우주식의 작용 이외에 다른 어떤 가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여기서 잠시 제 1편 <기가 뭐길래?>에서 언급했던 띠야르 샤르댕의 <오메가 포인트> 가설, 즉 <식>의 본성이 선한 것이며 그것은 우주 전체의 지고(至高) 지선(至善)을 목표로 우주를 진화시키고 통합시키려 한다는 가설을 검토해 보자.
<식>의 근원은 소립자에 있다. 소립자의 식은 소립자의 크기만큼이나 미소할 것이다. 거기에 ꡐ우주의 청사진ꡑ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만약 그렇다면 우주의 모든 움직임과 변화는 항상 선을 향하고 있을 것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바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선善>이란 개념 자체가 자연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자연은 소립자는 물론, 소립자가 고도로 조직화된 결과인 생물계에 있어서도 약육강식을 그 기본으로 하는 생존 경쟁의 마당이다. 자연계에서는 생존경쟁과 도태, 그리고 도태에 의한 진화가 있을 뿐이다. ꡐ진화ꡑ라는 관점에서 ꡐ선ꡑ은 오히려 ꡐ악ꡑ인 것이다.
<선>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낸 것이다. <선>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ꡐ사랑ꡑ은 왜 생겼을까? 자식에 대한 사랑은 종족번식 --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DNA)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본능일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을 자연이나 생물학적 관점에서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만 ꡐ사회적ꡑ으로 필요한 것이다. 서로 아끼고 보호하고 협동하는 사회는 분명히 그렇지 아니한 사회보다 번창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안전과 번식에도 유리한 것이다. 사랑은 이런 이유로 생겨났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물론 근본적으로는 생물적) 이유 이외에도 나는 사랑이 <식>에 의해서 저절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다른 의식과의 교감(정보 교환)을 원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러한 교감은 자신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혼자 존재하는 의식을 상상해 보시라.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우리가 친구를 사귀고 좋은 책, 영화, 음악을 즐기는 것이 그래서 이다. 식은 곧 정보요 정보는 사물의 관계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사랑은 언어가 생긴 이후에, 즉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된 이후에 생겼을 것이다. 서로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믿을 수 있게 된 이후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여행>에서 저가 이경숙이 정보를 “(외부의 존재에) 알리려는 힘”이라 정의하는 견해와 동일하다. 자연계에서 <선>의 근본(素子)을 찾는다면 “관계의 욕구”라는 형태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악한 인간(의식)도 많다.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다. 악한 의식은 그 사후식도 당연히 악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악마, 마귀, 잡귀, 악령 등의 사후식이 존재할 것이다. <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설명에 의하면 기는 동일한 유(類)의 기끼리 쉽게 잘 감응할 수 있다고 한다. 동기감응(同氣感應) 현상이다. 그렇다면 사후식의 세계에서도 악한 식들은 악한 식들끼리의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충분히 가능하다. 아마도 이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지옥일 것이다. 악한 식들끼리 서로 잘 지내지는 못할 것이니까 말이다.

<선>, <사랑>의 필요 내지는 그러한 개념의 발생을 약간 다른 측면에서 유추할 수도 있다. 물리학, 과학철학자인 서울대 장회익 교수는 <온생명 Global life>론의 창시자이다(저서“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그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전체로서 하나의 <온생명체>이라 하며, <온생명>에 대비하여 각각의 개별 생명체는 <개체생명>이라 한다. <온생명>은 단순히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재하는 ‘생명체’를 말하는 것이다.
장교수의 이론은 모든 생명체가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 개별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는 한 명확한 ‘생명의 정의’는 가능하지 않다.
-.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단독으로는 살 수 없고 상호 유기적인 의존-보완 관계 하에 있다.

생명의 정의는 다양하다. 물리학자 슈뢰딩거의 유명한 저서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life?"에서처럼 대체로 자기 복제와, 신진대사의 능력을 갖춘 것을 생명이라 하는데, 자기복제 능력은 결정, 프라이온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며, 신진대사는 자동차의 엔진도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식으로도 생명체에 대한 명확한 단독적 정의는 불가능한 것이다. 생명에 대한 정의가 다양한 것이 그래서이다.
장교수는 지구상의 전체 생명체를 <하나의 통합적 생명체>로 간주할 때에만 완벽한 생명의 정의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개미 집단에 소속된 한 마리의 일개미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라고는 도저히 말하기 어렵다. 한 마리의 일개미는 혼자서 번식도 생존도 불가능한 것은 물론 그 기능도 단위 생명체가 아니다. 개미는 <개미떼>로서 하나의 단위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넓게 그리고 엄밀하게 적용하면 우리는 지구 전체의 생명계를 <하나의 통합적 생명체> 간주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간주해야만 한다고 장교수는 주장한다. 그리고 이 ‘지구적 생명체’를 <온생명 global-life>라 명명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의 개체생명으로서 온생명의 일부분인 것이며, 온생명을 우리의 생명의 모태이며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사실’이라기에는 아직 논의의 여지가 많으므로)에 의하면 우리는 각자 개체생명만의 목적을 이기적으로 추구해서는 안 되며, 온생명 전체에 참여 협동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인간은 다른 생물종과 달리 온생명을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종(種)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온생명의 일원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개인, 또는 인간만의 욕심을 추구할 때 온생명의 진화를 저해하거나 심지어 온생명의 죽음까지도 불러 올 수 있는 것이다. 장교수의 <온생명> 이론의 목표는 이처럼 지구 생태계 전체에 대한 총합적 가치관의 새로운 정립에 있다. 이 이론은 <가이아 Gaia>이론과 비슷하지만, 가이아 이론에서는 지구의 생명계를 단순히 하나의 ‘계 界’로 간주하고 취급할 뿐이지만 온생명 이론은 보다 구체적, 실질적으로 <온생명>이 하나의 단위 생명체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이아 이론과 다르다.
온생명 이론은 급속한 과학 문명 -- 인간 능력의 확대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체계로서 훌륭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 생각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선>, <사랑> 등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온생명 이론은 약간의 보완 여지가 남아 있다.
먼저 온생명이 하나의 독립적 의식체인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생명의 단위는 의식의 단위체이다. 의식은 그것이 ‘외부’라고 인식하는 것에 대하여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온생명이 독립적 의식의 단위체가 아니라면 개체생명들이 제각기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일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장 교수는 온생명이 독립적 의식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언급하고 있으나, 그것을 인정할만한 이론적 현상적 증거는 찾기 어렵다. 따라서 온생명 이론은 개체생명의 이기심을 자제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는 일지만 충분한 당위성을 부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는 생명의 범위를 온생명까지 확장하는 일에는 개체와 전체의 이익의 모순적 충돌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체생명의 범위를 최대로 우리 자손까지 확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개체생명과 온생명 사이의 충돌이 완화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개체생명의 범위를 자손에게까지 확대한 가치관을 받아들이기도 쉬운 일이 아니며, 자손의 범위도 온생명에 비하면 지극히 좁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 온생명 이론의 한계가 있다.
그러함에도 온생명 이론은 물질문명 시대에 인간이 채택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가치관이며, 지극히 훌륭한 사상이라는 점은 누구나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온생명 이론의 범위를 사후식을 포함한 의식계에까지 넓혀 적용할 때에 완전한 이론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완전한 가치관으로서 정립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살아 있을 때에만 ‘나’가 아니라 사후에도 의식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나’인 것이며, 사후의 의식체(사후식)는 기의 형태로 생명계와 정보를 교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계와 의식계 -- 사후식의 네트워크 전체가 하나의 통합체인 것이다. 이처럼 전체 우주와 하나의 생명적, 정신적 통합체라는 인식 하에서 우리는 장 교수가 주창한 온생명적 가치관을 완전하게 정립할 수 있으며,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업보(業報)에 대하여>

사후식의 네크워크는 전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훌륭한 사후식의 영입을 필요로 할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방향으로 생명계의 의식에 작용할 것이다. 악한 의식에게는 제재가 가해질 것이다. 이처럼 우주식이 생명계에 해를 끼치는 의식--인간에게 제재를 가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업보>라 말한다. 이 <업보>를 조금 검토해 보자.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소립자의 식이 모여서 생명의 탄생과 진화를 통해서 의식을 형성하고, 의식들이 모여서 우주식을 만든다. 이 모든 과정과 결과들이 `우연'이 아니라 <식>의 본질적 성질인 <의지--기>가 작용하여 생기는 목적적 결과임은 <진화와 기>에서 말씀드렸다. 따라서 ꡒ우주의 목적ꡓ은 곧 ꡒ우주식의 형성과 발전ꡓ이며, 이것은 생명계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 ꡒ죄악ꡓ의 내용을 ꡒ생명계에 해를 끼치는 행위ꡓ와 ꡒ우주식의 고양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생각ꡓ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업보의 작용도 이에 따라 살아 있는 동안의 업보와 사후의 업보로 나눌 수 있다.
살아 있는 동안의 업보는 ꡒ악인은 벌을 받는다ꡓ라는 법칙이다. 그러나 이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사회학 이론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물론 형법을 어기는 행위는 국가의 사법권에 의해서 처벌되는 것이지만, 법망을 피해가면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선량한 사람들 보다 생존경쟁에 있어서 더 유리할 것이다. 그러니, ꡒ악인은 복을 받는다ꡓ라는 법칙이 생겼어야 당연할 텐데 어째서 ꡒ악인은 벌을 받는다ꡓ, ꡒ사필귀정ꡓ이라는 법칙이 생겨난 것일까?
이 법칙은 인간사회가 생긴 이래 줄 곳 있어온 법칙이며, 수많은 인간들의 삶을 통하여 얻어진 경험법칙이다. ꡒ악인이 결국 벌을 받는 현상ꡓ이 수 없이 목격되었다는 말이다. 사회를 관리하는 인간의 법이 허점 투성이라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ꡒ하늘의 법--천라지망(天羅之網)은 성글지만 빠져나갈 틈이 없다ꡒ라는 오랜 경험의 지혜가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ꡓ악인은 벌을 받는다ꡒ라는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 때문이다.
그렇다. 악인이 더 잘 살 것처럼 보이지만 악인은 벌을 받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심리적 사회적 법률적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ꡒ천벌ꡓ이 바로 그것이며, 그래서 ꡒ천라지망ꡓ이라는 깨달음이 생긴 것이다. ꡒ천라지망ꡓ이라는 말은 사후식의 네트워크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 같아서 무척 흥미롭다.
ꡒ천벌ꡓ--즉 업보는 형법처럼 즉각적으로 엄격하게, 또 가시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업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그래서 이다. 그러함에도 오랜 관찰과 경험이 업보를 증명하고 있다. 인간사회는 매우 복잡하다. 인간관계가 유기적으로 얽혀져 있으므로 악인에게 내리는 업보가 자칫 그 주위의 선량한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업보는 우주식의 목적이 아니며 또한 물리적인 법칙처럼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업보는 우주식이 자체의 고양을 위한 노력의 한 부분이라 생각하므로, 우주식이 업보를 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과 주의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우주식이 그 기를 통해서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인 기의 작용은 물질의 법칙(물리법칙)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작용의 강도는 상당히 제한적일 것이다.
업보의 작용이 그 사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이유가 이런 여러 가지 원인들 때문이다. 물론 여러 가지 사유로 살아 있는 동안에 업보의 적용이 불가능하다면 사후에 그 사후식이 업보를 받을 것임은 당연하다.

사후의 업보는 위에서 잠간 언급한 바처럼 사후식이 전체 네트워크로부터 받는 처벌일 것이다. 그것은 ꡒ왕따ꡓ 정도의 것일 수도 있고 ꡒ지옥ꡓ처럼 괴로운 상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그리고 선인들이 ꡒ지옥ꡓ을 말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나는 사후에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지옥이 있다면 물론 천국도 있을 것이다. 천국이란 사후식이 우주식이란 네트워크에 접속되어서 우주식의 높은 경지를 함께 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후식이 지옥 같은 상태에 처해 있든, 천국 같은 상태에 있든 우주식의 고양을 위해서는 윤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는 더 이상 고양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른 식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인간 세계가 더 높은 수준으로 향상될 때 까지는 말이다. 이것이 불교의 교리인 <해탈>일 것이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ꡒ생명계에 해를 끼치는 행위ꡓ 이외에 ꡒ우주식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치는 나쁜 생각ꡓ은 옛 가르침 그대로 ꡒ탐진치ꡓ이다. 인간사회의 법률에는 `생각에 대한 처벌' 법칙이 없지만 종교에서는 `나쁜 생각' 그 자체를 죄악시한다. 물론 나쁜 생각이 죄를 저지르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그러한 가르침이 나왔을 수도 있겠지만, 우주식의 관점에서 보면 나쁜 생각은 바로 죄악이다. 나쁜 생각을 가진 의식이 우주식에 접속되면 우주식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ꡒ올바른 마음가짐ꡓ이라는 종교와 선인들의 가르침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나쁜 생각을 하지 말라. 아니면 벌을 받는다'라는 사실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사실,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 없는 일이라면 우리의 삶은 현재의 삶과 전혀 다른 -- 상반되는 것이라야 한다. 논리적으로 말이다. 죽어서 몸도 마음도 없어지는 것이라면 윤리와 도덕과 사랑이 무슨 소용인가? 그러한 모든 `인간적 가치'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망상인가? 쾌락 이외에 가치를 둘만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 자식에 대한 사랑도 `그렇게 행동하도록 우연히 만들어진 DNA의 요구'일 뿐, 우리가 한갓 미소한, 그리고 `우연히' 만들어진 몇몇 분자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 DNA의 지시를 따를 필요가 무엇인가? 아니, DNA 어디에 사랑과 자비가 수록되어 있는가?
내가 지금까지 종교를 가지지 못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종교(신)의 근거와 그리고 사랑과 자비를 왜 필요로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원시시대의 인간은 "DNA적`이었다. 생존본능에 따라서 살고 행동하였다. 서로 죽이고 잡아먹었으며(식인의 증거는 원시인의 유적에서 널리 발견된다), 약탈하였다. 이런 방식은 고대뿐 아니라 근세의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에까지 뚜렷이 연결되고 있으며, 현재에도 국가, 인종, 종교간의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인간의 오랜 본능은 순수한 자기중심적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사랑과 자비가 개입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석가가 자비를 가르친 것은 2천 5백 년 전이고, 예수가 사랑을 가르친 것은 2천 년 전이다. 이에 비해서 원시인류부터 시작한다면 인간의 역사는 2 백만 년을 넘는다. 2천 ~2천 5백 년은 인류사에 있어서 극히 최근의 일인 것이며, 그 기간은 사랑과 자비를 정착시키기에는 아직 너무 짧은 것이다. 이런 역사를 근거로 나는 우주식의 수준이 근세에 와서 빠른 속도로 발전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인류 문화의 발달이 인간 의식의 향상을, 그리고 인간의식의 향상이 <우주식>의 향상을, 우주식의 향상이 인간의식의 향상을 촉진하는 식으로 ꡒ바른 되먹임(정 궤환; positive feedback)" 과정에 의하여 가속시켰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의 견해와 같이 인류문화 발전의 가장 큰 동력은 <언어>였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의 <의식>들이 서로 생각을 교환할 수 있었으며 서로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서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언어가 생기기 이전에 인간들은 상대(예를 들어서 언어가 다른 부족)의 생각을 알 길이 없었으며, `알 수 없는' 것은 곧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화석자료에 의해서 인간의 목 구조가 발음이 가능하도록 진화한 것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러나 원시시대의 언어는 그저 같은 무리 내에서만 의사소통이 가능하였지 다른 부족간에는 공통 언어가 없었을 것이다. 인류 문화와 문명의 역사가 길지 않은 이유이다. 인간이 최초로 사회다운 사회를 이루고서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은 일만 년이 채 되지 않는다. 고고학의 발굴 자료에 의하면 인간이 씨족사회를 벗어나 <도시>를 만든 것은 7천 년 내지 9천 년 전이다. 그 이전의 인류는 기껏해야 한 무리 내의 친족밖에는 서로 관계를 맞을 일이 없었으므로 따라서 사후식이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생시에 의식이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사후식이라고 해서 가능할 수 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물론 씨족, 부족 단위의 소규모적인 사후식의 네트워크는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통해서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고서도 한참이나 후에 불교, 그리고 기독교가 생길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는 곧 우주식의 가르침이요 요구사항인 것이다.

우주식의 `연령'이 아직 `어리다'면 앞으로의 성장속도는 매우 빠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식은 옛날보다 더 강해졌으며 앞으로 가속적으로 더욱 강해질 것이다. 현재 모든 과학의 기본인 물리학이 그 ꡐ완성ꡑ을 자신할 정도로 발달한 지금, 과학적으로 인정 받고 있지도 못하는 <기>를 믿으며 수련하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는 사실을 보면 현재 우주, 또는 사후식의 기는 아주 강한 것 같다.
우주식과 인류문명의 발전이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면, 20세기에 이룩한 인류 문명의 눈부신 발전에 가속을 더한 21세기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우주식이 살아 있는 인간에게 확연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을 정도의 기를 미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는 우주식이 인간세계와 직접 연결되어서 우주식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수도 있다. 그것이 ꡒ개벽ꡓ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살아 있는 인간도 우주식과 교감이 가능할 것이며, 그 효과는 나로서도 상상하기 어렵다. 생명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지도 모르며, 그래서 물질계인 `이 세상'이 끝나고 사후식들의 세계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후심판의 날이요 그 때에 모든 <의식(인간)>들이 우주식과 직접 접속되는 일이 `휴거'일 수도 있다. 그때까지 충분히 고양되지 못한 의식은 더 이상 고양될 수 없을 지도 모르며, 고양되더라도 상대적으로 다른 식들 보다 열등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우리의 ꡐ윤회할 기회ꡑ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며, 따라서 ꡒ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은 이루기 어렵네 少年易老 學難成ꡓ 라는 교훈의 의미를 절박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자신의 업식 業識 관리에 노력해야 할 때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 `다음 생에 하지 뭐~~'하고 게으름을 피울 여유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후의 심판'이 가까이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이처럼 <식과 기>를 도입하면 소립자들로부터 우리의 삶과 사후세계까지도 일관성 있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내가 무척 놀랐고 또 관심을 가지고서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공부를 하고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더 이상의 언급은 이 글의 목적과 나의 수준을 벗어나므로 자신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시기 바란다. 모든 종교는 그 궁극적인 원리와 목적이 동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큰 진리에 비해서 약간의 오차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 <식과 기>를 모르던, 그래서 종교의 가르침들을 무시하던 내가 이제 그 가르침들의 가능성을 깨닫고서 전율하고 기뻐하는 이유를 이해하시리라.

나의 삶이 이제 의미와 목적과 가능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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