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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전학 - 라마르크

minjpm 2010. 7. 22. 11:33

2009년 ‘다윈의 해’에 기린만큼 자주 화제에 오른 동물도 없을 것이다. 원시 기린이 점점 더 높은 곳의 이파리를 뜯어먹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신경액(nervous fluid)’이 기린의 목을 점점 길게 만들어주었다는 프랑스의 진화학자 라마르크의 주장을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바로잡아 주었다는 그 유명한 얘기가 일년 내내 세계 곳곳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획득 형질의 유전

라마르크는 생명체 자신의 행동을 매우 중요한 진화의 요인으로 생각했다. 오랜 기간에 걸친 반복적인 행동이 결국 형태를 만들어내고 이어서 기능이 따라온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흔히 다윈이 종교계와 껄끄러웠을 것으로 이해하지만, 라마르크야말로 다윈보다 훨씬 앞서 생물의 삶이 조물주에 의해 미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 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진화 이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동물의 신체에서 새로운 기관의 탄생은 계속해서 가해지는 새로운 필요와 그 필요가 만들어내고 유지해주는 새로운 동향에 기인한다.

 

2. 생물이 오랫동안 처해온 상황과 그로 인해 어느 기관 또는 부분의 활발한 이용이나 지속적인 불용의 영향에 따라 자연이 얻거나 잃게 만드는 모든 것은, 이렇게 획득한 변화들이 양성 모두에게 또는 새로운 개체들을 생산한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면, 그들로부터 태어나는 새로운 개체들에서 세대를 거듭하며 유지된다.

 

흔히 ‘용불용설(用不用說)’과 ‘획득 형질의 유전’으로 알려진 라마르크의 이론과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을 비교하기 위해 후세의 학자들이 주로 사용한 예가 바로 기린의 목이다. 사실 다윈의 [종의 기원]에는 기린의 목에 대한 언급이 없다. 마치 총채처럼 생긴 기린의 꼬리가 날파리들을 쫓기 위한 진화적 적응이란 설명은 있어도 정작 기린의 목에 대한 설명은 없다. 후세의 생물학자들이 라마르크와 다윈 사이에 이를테면 기린 싸움을 붙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기린은 설명이 필요한 동물이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기린만큼 기이한 동물도 그리 많지 않다. 그 길고 굵은 목 위에 어쩌자고 그리도 조막만한 얼굴을 올려 놓은 것일까? 그리 큰 뇌는 아니지만 워낙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바람에 그곳에 피를 밀어 올리기 위해 기린은 길이 60cm, 무게 10kg의 거대한 심장을 갖추고 어마어마한 유지비를 들이며 그걸 운용하고 있다. 기린이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앞다리를 있는 대로 쩍 벌린 채 목을 한껏 낮춰 겨우 물을 마시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합의를 보지 못한 디자이너들이 제가끔 자기 주장만 하며 만든 몽타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기린의 목은 라마르크의 이론과 다윈의 이론을 비교하기 위해 후세의 학자들이 주로 사용한 예이다.

현재 기린의 목이 길어진 이유는 성선택의 영향이 크다고 보고 있다.

 

 

사실 기린의 목이 길어진 이유는 먹이 때문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관찰해보니 기린들은 먹이가 귀한 건기에도 나무 꼭대기가 아니라 어깨 높이에 있는 잎들을 주로 따먹는단다. 기린의 목이 길어진 진짜 이유는 먹이가 아니라 짝짓기에 있었다. 길고 굵은 목을 가진 수컷들이 싸움도 더 잘하고 암컷들에게도 더 매력적이란다. 그러니까 기린의 목이 길어진 과정에는 자연선택보다 성선택의 영향이 훨씬 더 컸던 것이다. 함부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범한 형질들의 배후에는 성선택이 자연선택보다 훨씬 자주 버티고 서 있는 듯싶다.

 

 

라마르크의 문제, 획득 형질의 유전은 일어날 수 없다?

이른바 분자생물학의 핵심 원리(central dogma of molecular biology)에 따르면 라마르크의 이른바 ‘획득 형질의 유전’은 일어날 수 없다. 제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하여 왕(王)자 복근을 얻는다 해도 내 아기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복근을 뽐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테면 유전자에 새겨진 복근이 아니면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이클 조던의 아들이라고 해서 연습도 하지 않았는데 그의 아버지가 전성기 때 보여줬던 드리블과 슈팅 실력을 그대로 닮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지금 그의 아들들은 대학에서 농구선수로 뛰고 있지만 솔직히 아버지의 기량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 같다. 미국 레이크 플래시드에서 열린 2009-2010 국제빙상경기연맹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 5차 대회 쇼트 프로그램에서 2위의 미국 선수보다 무려 17.48점이나 높은 76.28을 얻어 세계 신기록을 수립한 우리 김연아 선수가 결혼하여 딸을 낳아도 그 아이가 자동적으로 엄마가 지닌 발군의 실력을 물려받는 것은 아니다. 소수점의 차이를 두고 선두경쟁을 하는 게 보통인 피겨 스케이팅에서 일찍이 이처럼 압도적으로 우수한 선수가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탁월한 김연아이지만 그의 딸도 결국 엄마처럼 피눈물 나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챔피언이 될 수 없다. 조던과 김연아의 자식들이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자식들에 비해 탁월한 운동 감각을 지니고 태어날 가능성은 있지만 부모가 부단한 노력으로 당대에 획득한 실력이 자손에게 그대로 유전되는 예는 아직 관찰된 바 없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우리 진화생물학자들은 그동안 은근히 라마르크가 옳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했다. 라마르크의 부활을 부추기는 두 가지 열망은 바로 진화의 속도와 효율성이다. 만일 라마르크가 옳다면 불과 600만 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1% 남짓의 유전자 차이밖에 만들어내지 않은 침팬지와 우리가 어떻게 이처럼 다르게 진화할 수 있었을까를 훨씬 쉽게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 만일 그렇다면 나뭇잎 모양을 쏙 빼 닮은 베짱이의 의태(mimicry), 그저 초록빛에 나뭇잎 모양만 닮은 게 아니라 잎맥은 물론 심지어 벌레 먹은 자국까지 흉내 낸 의태, 거의 의도적으로 보이는 그 기막힌 자연의 조화를 훨씬 더 편안하게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 라마르크의 이론이 옳았다면 진화의 속도에 관한 그 수많은 공격들을 참으로 가볍게 받아넘길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나뭇잎 벌레(Phylliidae).
<출처: (cc) Sandilya Theuerkauf>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우리가 이런 현상들을 다윈의 이론으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라마르크의 이론 없이도 충분히 잘 설명하고 있으며, 그 중 가장 매력적인 설명은 역시 도킨스로부터 온다. 그는 [불가능의 산을 오르며 Climbing Mt. Improbable]에서 이를 등산에 비유하며 설명한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막힌 적응 현상을 보며 비판자들은 종종 도대체 어떻게 하루아침에 산기슭에서 산봉우리로 뛰어오를 수 있느냐고 머리를 흔든다. 도킨스의 설명을 우리나라 상황에 맞춰 각색하면, 단번에 평지에서 백두산 정상으로 뛰어오른 게 아니라 비교적 평탄한 비탈로 조금씩 조금씩 오른 것이다.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 부르는 우리나라의 백두산은 한반도에서 올려다보면 엄청나게 가파르고 높은 산이지만 중국 쪽에서는 완만한 경사를 따라 하염없이 가다 보면 어느덧 정상에 다다르는 그런 산이다.

 

다윈의 말대로 아무리 대단한 적응이라도 오랜 세월에 걸쳐 작은 변화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진다. 정말 그럴 만큼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것일까 의심스럽다면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의 저자이자 미국 미시건대학 사회과학연구소 소장인 랜덜프 네스(Randolph Nesse)의 설명에 귀 기울여보라. “만일 우리가 청소를 하지 않아 1년에 1mm의 먼지가 쌓인다고 가정해보자. 10년이면 1cm, 100년이면 10cm의 먼지가 쌓일 것이다. 그렇다면 1천 년이면 1m가 쌓이고 그로부터 1천 년만 더 지나면 몇몇 농구선수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지에 파묻혀 죽고 말 것이다.” 2천 년이란 세월은 진화의 관점으로 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런 짧은 시간에 자칫하면 인간의 멸종이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는 진화적 변화가 얼마나 역동적일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후성유전학, 라마르크의 부활?


라마르크의 부활을 기다리던 그의 사도들에게 얼마 전부터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꿈에도 그리던 신대륙으로 그들을 인도할 구세주는 바로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다. 후성유전이란 DNA 염기서열에 변화를 수반하지 않으면서 유전자 발현 메커니즘에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 같은 변화는 일단 일어나더라도 대개 세포나 개체의 생애 동안 유지되는 게 보통이지만 때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지기도 한다. DNA와 그 나선 안에 파묻혀 있는 공 모양의 히스톤(histone) 단백질을 통틀어 염색질(chromatin)이라고 하는데, DNA가 히스톤을 감싸는 방식이 변하면 유전자 발현의 양상도 변한다. 이 같은 염색질 개조(chromatin remodeling)는 종종 DNA 메틸화(DNA methylation)에 의해 일어난다. 유전체의 염기서열에서 시토신(cytosine)과 구아닌(guanine)이 연속적으로 번갈아 존재하는 CpG 부위에 메틸기가 붙으면 시토신이 메틸시토신으로 변한다. 아직 그 원인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특별히 메틸화가 심하게 일어난 부분은 전사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경우 이 부위에 있는 시토신의 3~5%가 메틸화되어 있다. CpG 부위는 유전자의 전사를 조절하는 프로모터(promotor) 근처에 위치하며 CpG의 메틸화는 특정한 유전자의 발현을 제어할 수 있다. 이 같은 후성유전의 효과는 대개 몇 세대를 거치면 사라지는 경향을 보이지만 진화의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을 듯싶다.

 

이러한 메틸화나 히스톤의 변형으로 일어나는 가장 두드러지는 진화적 현상은 유전적 각인(genetic imprinting)이다. 부모 중 어느 한 쪽으로부터 받은 유전자에만 특이하게 나타나는 유전 현상으로 메틸화 등으로 인해 한 쌍의 대립인자 중 한쪽에만 발현된다. 이처럼 생식세포 계열(germ line)에 각인이 일어나면 그 개체의 모든 체세포에서 발현된다. DNA의 염기서열을 변화시키지 않으며 멘델의 유전법칙을 따르지도 않는 유전자 각인은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와 곤충, 그리고 현화식물에서 관찰되었다. 인간의 경우에는 주로 베크위드-비드만 증후군, 실버-러셀 증후군 등 유전병에 관련된 유전자 각인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포유류 전체로 보면 대체로 유전체의 1% 미만의 유전자에 정상적인 각인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버드대학의 진화생물학자 헤이그(David Haig)와 그의 동료들에 따르면 유전자 각인은 유전적 이득을 둘러싼 부모간의 갈등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아버지는 대개 자기 자식의 성장에만 관심을 두는 데 비해, 어머니는 현재 양육하고 있는 자식에게 충분한 영양을 제공하면서도 장차 태어날지도 모를 자식과 자기 자신을 위해 에너지의 일부를 비축해야 한다. 그래서 ‘부모 갈등 가설(parental conflict hypothesis)’은 아버지 쪽으로 각인된 유전자는 대체로 성장을 촉진하는데 반해 어머니 쪽으로 각인된 유전자는 성장을 억제하는 경향을 띤다고 예측한다. 실제로 유전자 각인은 암컷의 자식 양육 투자가 큰 태생포유류(placental mammal)에서는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반면, 새나 난생포유류(oviparous mammal)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최근 후성유전학의 발달로 인해 라마르크의 무덤을 기웃거리는 마리아들이 부쩍 많아졌다. [체세포 선택과 적응 진화—획득 형질의 유전에 관하여 Somatic Selection and Adaptive Evolution: on the Inheritance of Acquired Characters, 1981)]와 [라마르크의 서명 Lamarck’s Signature, 1998]을 저술하며 라마르크의 수제자를 자처하는 에드워드 스틸(Edward J. Steele)과 [후성유전과 진화Epigenetic Inheritance and Evolution: The Lamarckian Dimension, 1995)와 [네 차원의 진화Evolution in Four Dimensions, 2005)의 공저자 에바 야블롱카(Eva Jablonka)와 매리언 램(Marion J. Lamb)은 모두 후성유전을 라마르크 식의 진화로 분석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들은 모두 역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라마르크의 진화 이론과 후성유전의 연구 결과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존재한다. 라마르크는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얻은 생리적 적응이 후손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지 환경이 생명체의 유전자 발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지 않았다.

 

 

후성유전도 결국 다윈의 진화 이론 안에 있다

흔히 후성유전학이 표상한다고 믿고 있는 라마르크 식의 유전은 오히려 다윈과 월리스의 설명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1858년 린네학회에서 월리스와 함께 발표할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1857년 하버드대학의 식물학자 그레이(Asa Gray)에 보낸 다윈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자 이제 변화를 겪고 있는 한 나라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는 주민의 일부를 약간 다르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그들에게 선택이 일어날 만큼 언제나 충분히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부 주민들은 제거될 것이고, 나머지는 다른 일군의 주민들의 상호 활동에 노출될 것인데 나는 이것이 각자의 삶에 단순히 기후보다 훨씬 더 중요하리라 믿는다.”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 1744~1829, 좌)와 바이스만(August Weismann, 1834~1914, 우).
후성유전은 ‘친(親)라마르크’가 아니라 ‘반(反)바이스만’이라고 해야 옳다.

 

다윈도 라마르크와 마찬가지로 생명체의 생애 동안 겪는 경험이 유전에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었다. 흥미롭게도 이는 창세기 30장 37~39절이 전하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 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유전은 오로지 생식질(germ plasm)에 의해서만 일어난다고 주장한 것은 19세기 말 독일의 생물학자 바이스만(August Weismann)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후성유전은 사실 ‘친(親)라마르크’가 아니라 ‘반(反)바이스만’이라고 해야 옳다. 현대 후성유전학의 덕택에 우리는 이제 유전자만이 유전을 책임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라마르크의 부활을 담보할지는 못할 것 같다. 오히려 바이스만의 부활을 막을 뿐이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후성유전은 결국 다윈의 진화 이론 안에 있다. 미국 영장류학의 개척자 중의 하나인 하버드대학 인류학과의 어빈 드보어(Irven DeVore) 교수는 그의 강의에서 종종 “우리는 여전히 다윈의 샘으로 돌아가 목을 축인다”고 말하곤 했다. 다윈은 우리 후배 진화생물학자들을 참으로 맥 빠지게 만든다. 우리가 뭔가 새로운 걸 발견했는가 싶어 흥분하며 그의 책을 뒤적이다 보면, 조금 지저분한 표현으로 어딘가 어떤 형태로든 그가 벌써 침을 발라 놓은 걸 발견하게 된다.

 

 

 

최재천
최재천 /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개미제국의 발견],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대담] 등이 있다. 2000년 제 1회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수상했다.

 

 원문보기 : http://navercast.naver.com/science/biology/3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