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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쇼팽이 살던 폴란드 바르샤바는 독립을 위한 민중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혼란스러움을 벗어나고자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그는 가족과 마지막 휴가를 보낸 뒤 1830년 10월 11일 폴란드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열었고, 바로 이 자리에서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를 초연했다. 환송식이 열린 자리에서, 폴란드의 흙이 담긴 은잔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11월 2일, 쇼팽은 “죽기 위해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라는 느낌을 뒤로 한 채 다시는 밟아보지 못할 폴란드의 땅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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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 / 에밀 길렐스[피아노], 유진 오먼디 &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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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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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협주곡 1번 3악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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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 아르투르 루빈스타인[피아노], 발렌스타인 & Symphony of the Ai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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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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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협주곡 2번 3악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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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까지 무료로 전곡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음원제공 : 소니뮤직 | |
피아노 협주곡에 담긴 첫사랑에 대한 은밀한 고백
1829년 8월 빈에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마치고 바르샤바로 돌아온 쇼팽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바르샤바 음악원 졸업과 빈에서의 성공은 쇼팽이 본격적으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의 미래를 계획하고자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자신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렵 열 아홉 살의 쇼팽은 처음으로 여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쇼팽의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끝이 났지만, 처음 느끼는 강렬한 기분과 뜨거운 가슴이 고스란히 음악으로 녹아들어 바르샤바 시대의 절정을 장식하는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 |
그의 친한 친구인 티투스 보이체코프스키(Tytus Woyciechowski)에게 1829년 10월 3일에 쓴 편지에 [피아노 협주곡 2번]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숭배할 수 있는 이상형을 찾았다네. 매일 밤 그녀 꿈을 꿀 정도야. 그러나 그녀를 처음 본 지 6개월이 지나도록 나는 한 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있네. 협주곡 f단조의 느린 악장을 작곡하면서 그녀를 떠올리곤 하지.”
그 상대는 폴란드 음악원의 학생이었던 성악가 콘스탄치아 글라드코프스카(Konstancja Gladkowska)였다. 그녀는 자신을 짝사랑한 쇼팽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고, 쇼팽이 세상을 뜨고 난 뒤 모리츠 카라소프스키(Moriz Karasowski)가 쓴 쇼팽 전기를 접하고서야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곧 잊어버리게 된 이 풋사랑에 대한 감정이 [피아노 협주곡 2번] f단조의 라르게토 악장과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의 로망스 악장에 충분히 표현되어 있음을 쇼팽 생전에 알고 있었던 사람은 오직 친구 티투스 보이체호프스키뿐이었다. 그의 소심한 마음 때문인지 이 [2번 협주곡]은 글라드코프스카에게 헌정되지 않고, 몇 해 뒤 파리 시절 친교를 맺은 미모의 백작 부인 델핀 포토카에게 헌정되었다는 아이러니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피아노 협주곡의 새로운 어법이 탄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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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은 낭만주의 협주곡 양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작품으로 평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불균형이 단점으로 오랫동안 지적받아 왔다. 쇼팽 스스로도 오케스트라 반주 없이 솔로 파트만 연주했던 것을 미루어본다면, 그가 오케스트라 부분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파리 시절에도 주위에서 폴란드 고유의 양식을 대변할 만한 오페라를 작곡하라고 부추겼지만, 자신의 미숙한 관현악 기법을 알고 있었던 쇼팽은 솔로 피아노를 위한 작품에 더욱 집착했다. 그러나 이를 안타깝게 여겼던 많은 작곡가들이 그 관현악 파트를 보강하고자 했다. 그 대표적인 개정판으로 쇼팽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 칼 타우지히(Karl Tausig)가 교정한 [1번 협주곡]과 카를 클린트보르트(Karl Klindworth)의 [2번 협주곡]을 꼽을 수 있다.
쇼팽은 피아니스트로서 단 30여 회의 대중 연주회를 가졌다. 이 가운데 절반 정도는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특히 1번을 자주 연주했다. 1830년 11월 폴란드를 떠난 그는 빈, 브레슬라우, 뮌헨, 파리를 경유하며 개최한 연주회에서 [1번 협주곡]을 연주했지만 그 이전에 작곡한 [2번 협주곡]만큼 뜨거운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고 한다. 1832년 2월에 가진 정식 파리 데뷔 연주회에서야 비로소 [1번 협주곡]은 그가 기대했던 수준의 찬사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이후 성공적인 평가를 받은 [1번 협주곡]은 파리에서의 쇼팽의 위상을 확고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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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협주곡]은 1830년 3월 17일 바르샤바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이 공연은 쇼팽의 바르샤바 정식 데뷔 무대이기도 했다. 당시 관습에 따라 1악장 연주를 마치고 난 뒤 호른과 현악기를 위한 즉흥곡을 한 곡 연주하고 2, 3악장을 연주했다. 초연 당시의 여러 신문들은 이 협주곡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쇼팽의 뛰어난 연주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특히 당시 비평 중에 오케스트라 튜티 부분이 피아노와 잘 어우러지며 협주곡의 정신을 완벽하게 전달했다는 비평이 이채롭다. 현재 작품번호는 제1번 e단조가 Op.11로 앞서 있지만, 사실은 제2번 f단조 Op.21이 한 해 먼저 작곡되었다. 이렇게 작곡 순서와 출판번호가 뒤바뀐 이유는 쇼팽이 먼저 작곡한 2번에 비해 나중에 쓴 1번을 더 만족스러워했기 때문에 이를 먼저 출판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
1악장 - 알레그로 마에스토소
긴 오케스트라의 서주에 이어 등장하는 피아노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명인기적인 활약이 탁월하다.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젊은 쇼팽의 수줍은 열정이 조용히 피어오르는 모습이 느껴지는 듯한 대목이다. 전형적인 제시-발전-재현-코다의 틀을 지니고 있으나 내용면에서는 보다 자유로운 진행과 분위기를 바탕으로 그 청초한 서정성을 만들어 나간다.
2악장 - 로망스 : 라르게토
빠르기표에서 암시되었듯이 낭만적인 서정성의 효시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악장이다. 약음기를 단 바이올린에 의해 짧은 서주가 제시된 뒤 칸타빌레 주제의 피아노가 등장하며 아름답고 깊은 내면의 소리를 표현해 낸다.
3악장 - 비바체 C샤프 단조로 시작하는 짧은 주제에 이어 피아노에 의해 제시되는 론도는 모차르트를 연상시키는 듯한 재기발랄함으로 가득 차 있다. 꾸밈음과 장식음이 빈번하게 사용되는 독주 피아노는 종지부에 이르면서 더욱 빠르고 강한 에너지와 화려함을 더한다.
피아노 협주곡 2번 f단조
1악장 - 마에스토소 고전적 협주곡 스타일에 따라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훨씬 간결하고 압축된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2악장 - 라르게토 쇼팽 피아노 협주곡의 백미는 단연 느린 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 차 있는 이 라르게토 악장은 첫사랑에 대한 지고지순한 쇼팽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는 만큼 더욱 애절하다.
3악장 - 알레그로 비바체 쇼팽의 조국인 폴란드를 대표하는 무곡인 마주르카 스타일의 리듬을 가진 세 개의 주제로 엮어진다. 후반부는 호른의 팡파레에 의해 분위기가 고조되며 피아노의 화려함과 더불어 웅장한 피날레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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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박제성 / 음악 칼럼니스트,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 역자
-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써 온 음악 칼럼니스트 공연, 방송, 저널활동, 음반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미지 TOPIC / corbis
음원 제공 소니 뮤직
원문보기 : http://navercast.naver.com/classical/masterpiece/2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