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가 고대국가의 주요한 멸망 원인이란 가설이 점차 과학계의 지지를 받고 있다. 독일 연구자들은 2007년 과학전문지 <네이처>에서 호수와 해저 퇴적물을 분석한 결과 700~900년 사이 세계적으로 춥고 건조한 기후가 계속됐음을 밝혔다. 당나라가 몰락한 907년 무렵 마야문명도 붕괴했고 알프스의 빙하도 확장했다. 2008년에는 중국 과학자들이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에서, 수백년을 이어오던 중국의 5대 왕조 가운데 당, 원, 명 등 3개 왕조가 수십년 동안 여름 몬순이 갑자기 약해지고 춥고 건조한 겨울 계절풍이 강해진 직후 붕괴했다고 밝혔다. 강수량 부족으로 쌀생산량이 급감해 기근이 만연하고 사회적 혼란이 국가의 붕괴를 가져왔을 것이다. 반대로, 송나라 황금기 때는 여름 계절풍이 가장 강해 강수량이 풍부했다. |
지난 50만년까지의 기후를 높은 해상도로 복원 가능

빙하, 심해나 호수 퇴적층, 산호초, 나이테 등의 단서에서 과거의 기후를 추론하는 고기후학이 기후변화의 수수께끼를 풀 학문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우경식 강원대 지질학과 교수는 “지구온난화가 초래할 지구의 미래를 내다보려면 과거의 기후가 어떻게 변했는지 가능한 한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과학자들은 1300여년 전의 강수량 변화를 10년 단위로 알아낸 비결은 동굴에 있었다. 우 교수는 “석순 등 동굴생성물은 지난 50만년까지의 기후를 높은 해상도로 복원할 수 있는데다 세계 곳곳에 분포하고 데이터 확보가 상대적으로 쉬워 고기후학에서 특히 주목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사이언스>에서 중국 과학자들의 논문을 논평한 기디온 헨더슨 영국 옥스퍼드 대 교수는 “고기후학에서 지난 20년이 시추한 얼음의 시대였다면 앞으로 20년은 동굴생성물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기후변화는 급격하게 이뤄진다. 지난 50만년 동안 빙하기는 10만년을 주기로 찾아왔다. 지난 10만 년 동안의 기후변화를 살펴보면, 불과 수십년만에 급격하게 온난화가 진행되다 수백~수천년 동안 완만한 한랭화가 뒤따르고 이어 매우 급격하게 온도가 곤두박질치는 ‘톱니 그래프’ 모양의 기후변동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런 과거 기후를 적어도 1천 년 단위로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동굴생성물은 계절 단위까지 기후변화를 기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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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관음굴 석순 200년 단위 분석해보니 6번 강수량 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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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회동굴은 이산화탄소를 머금어 약산성을 띠는 빗물과 죽은 식물이 분해돼 생기는 유기산이 녹은 지하수 등이 탄산칼슘 성분의 석회암을 녹여서 형성된다. 석회동굴 안에서 지하수에 녹아있던 이산화탄소가 동굴 공기속으로 빠져나가고 수분이 증발하면, 과포화 상태가 된 칼슘과 탄산염 이온이 방해석이나 아라고나이트 같은 탄산염 광물을 침전시킨다. 이 침전물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낸 것이 석순, 종유석, 종유관 등의 동굴생성물이다.

(이산화탄소가 빠져나가면서 평형 상태가 깨져 왼쪽 방향으로 화학반응이 진행되고, 탄산칼슘이 침전해 동굴생성물을 이룬다.)
충북 단양의 에덴동굴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동굴생성물을 통해 과거 한반도의 기후변화를 알아본 곳이다. 우 교수팀이 이곳에서 채집한 길이 20㎝, 직경 28㎝인 석순을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해 연대측정을 한 결과 53만7천년 전부터 9만6천년 전 사이에 자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석순이 약 44만년 동안 쉼 없이 똑똑 떨어진 물방울 속 탄산칼슘이 굳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약 35만년 전 지하수 공급이 완전히 끊겼다. 그 바람에 석순은 11만년 동안이나 성장이 멈췄다. 당시 석순의 표면에는 오돌토돌한 동굴산호가 돋아 있었다.
우 교수는 “이 기간 동안 한반도가 빙하기 영향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석순의 성장선을 자세히 분석한 결과 약 40만년 동안 각각 6차례의 크고 작은 빙하기와 간빙기가 한반도에 닥쳤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심해저 퇴적물의 유공충 화석에서 밝혀진 세계적 빙하기 주기와 일치하는 양상이다. | |
강원 삼척시 관음굴 석순에 대한 연구는 9만년 전부터 2만년 동안 연속적으로 성장한 석순을 200년 단위로 분석했다. 그 결과 이 기간 동안 6번에 걸쳐 강수량이 급감한 시기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여름철 몬순이 약해져 강수량이 줄어드는, 당나라 멸망 직전의 사태가 수천년마다 찾아왔던 것이다. | |

제주 용천굴 석순 ‘기후 돋보기’ 대보니 역사적 기록과도 일치

우 교수팀은 제주 용천굴에서 ‘기후 돋보기’를 더 바짝 들이댔다. 용천굴은 용암동굴이지만, 동굴 위 조개껍질 등이 쌓인 사구를 지나면서 탄산칼슘 성분을 머금은 빗물이 동굴 안으로 들어와 탄산염 광물로 이뤄진 동굴생성물이 자라는 세계적으로 드문 동굴이다.약 1400년 전 삼국시대의 우리 조상 누군가가 무슨 이유에선지 횃불을 들고 동굴에 들어왔다. 그가 집어던진 횃불 나무토막 위에 탄산칼슘이 든 물방울이 떨어져 석순이 자라기 시작했다.

248개의 성장선이 드러나 있는 약 11㎝ 길이의 이 석순에는 놀라운 기록이 들어있다. 16세기 중반부터 약 100년 동안 극심한 건조기가 나타난 것이다. 16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는 세계적으로 소빙기가 찾아왔다. 조선시대에도 이 기간 동안 극심한 가뭄과 홍수, 냉해 등이 빈발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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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조선 현종 때인 1670~1671년 ‘경신 대기근’ 때는 7월에 우박과 서리가 내리고 여름내 가뭄으로 들판이 타들어가다가 가을에는 초대형 태풍과 물난리가 덮쳐, 제주 목사는 “인육을 먹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리기도 했다.
연구팀이 조사한 평창 섭동굴의 종유관에서는 2002년 이 지역을 강타한 태풍 루사와 이듬해에 빗겨간 태풍 매미의 기록이 대조를 이루며 남아있기도 하다. 기후 지시자로서 동굴생성물의 가치를 보여준 것이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려면 한반도에 어떤 양상으로 기후변화가 나타났는지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강원대의 동굴생성물 연구에 참여한 조경남 박사(한국해양연구원 극지연구소 연수연구원)는 “최근 한반도의 온도 상승폭이 세계적으로 높은데 과거에도 그런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알아야 한다”며 “동굴생성물 연구 결과를 보면 한국은 중국과도 다른 양상을 보여, 한반도의 독자적인 고기후 연구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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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동굴 실태

남한에는 약 1천개의 동굴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회암이 널리 분포한 강원도 강릉, 삼척, 정선, 평창, 태백, 영월과 충북 단양에 석회동굴이 많이 있다. 이 밖에도 경북 문경, 안동, 울진, 평해, 전남 화순, 전북 익산, 무주의 석회암 지대에도 동굴이 분포한다. 제주도의 현무암 지대에는 다수의 용암동굴이 있다. 제주의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는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는데, 특히 용천동굴과 당처물동굴은 용암동굴에 스며든 석회 성분이 빼어난 경관을 이룬 곳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석회동굴은 수백만~수천만년 전에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 5억년 전 바다 밑에서 퇴적된 석회암이 대륙이동 과정에서 지상에 노출된 뒤 지하수면 근처에서 동굴로 형성되는 정확한 시기를 알아내기는 매우 어렵다. 반면, 용암동굴은 화산암을 통해 형성연대를 비교적 정확하게 알 수 있는데, 제주도 용암굴의 연령은 10만~30만년 전이다. | |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굴 가운데 공개된 곳은 삼척 환선굴, 영월 고씨동굴, 울진 성류굴, 단양 고수동굴, 노동동굴, 온달동굴, 제주 만장굴과 협재·쌍룡굴 등인데 대부분 심각한 훼손과 오염에 시달리고 있다. 동굴을 자연유산이 아닌 관광지로 개발함으로써 조명 때문에 이끼가 자라는 녹색오염과, 관람객이 만져 생기는 흑색오염, 전문 도굴꾼이 포함된 동굴생성물 훼손 등이 많은 동굴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삼척 대금굴에서 한정된 관람객을 상대로 한 가이드 관광을 하고 있으며 곧 개방될 평창 백룡굴에서도 탐방객을 하루 150명으로 한정하는 가이드 관광만 허용할 예정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