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파 음악이 후기 낭만과 20세기로 이어지기까지 슈만은 낭만파 음악의 든든한 옹호자이자 버팀목의 역할을 한 음악가였다. 슈베르트로부터 독일 리트의 전통을 이어받은 슈만은 기악곡 분야에서 특히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시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또한, 19세기 독일 음악계에서 표제음악이 시작되는 데 큰 공헌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당대를 호령한 평론가이자 편집자였다. [음악신보]라는 잡지를 창간한 슈만의 비평 활동은 베토벤을 하나의 큰 기둥으로 삼아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슈베르트, 쇼팽, 베를리오즈, 리스트 등 당대 작곡가들의 빼어난 점들을 적극 소개해 낭만파 음악의 번영을 위해 싸웠다. 1853년 작곡가 브람스와 만난 슈만은 브람스의 새로운 음악에 대한 비평과 찬사를 통해 브람스를 세상에 소개하며 비평활동의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과 파가니니의 센세이션
슈만과 함께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프레데릭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1849)은 낭만파, 아니 전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피아노 음악 작곡가 중의 한 명이다. 쇼팽은 씩씩한 기운과 우울하고 멜랑콜리한 감정의 양면성을 서로 대조시키며 별빛처럼 반짝이는 사랑스러운 감정을 피아노로 표현했다. 쇼팽의 특징은 조를 바꾸면서 변화하는 멜로디에 깃든 시적 감수성, 높은 수준의 기교를 요구하는 곡의 운영과 해석에 있다. 쇼팽의 피아노곡은 리듬이나 다이내믹 작용 또는 템포 루바토와 강약기호, 속도기호, 피아노 페달의 사용 등 연주자의 세심한 기교와 만날 때 놀랄만치 독창적인 억양과 색채감을 만들어낸다. 단적으로 말해, 슈만의 피아노 음악이 시어를 음악에 새겼다고 한다면, 쇼팽의 작품은 약동하는 음이 써내려 가는 즉흥시와도 같다. 그것이 쇼팽이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린 이유다.
폴란드 태생의 쇼팽은 파리에서 예술활동의 전성기를 일구어냈다. 당시 프랑스 파리는 유럽의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이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 위해 몰려들던 예술의 중심지였다. 파리 데뷔 연주회를 통해 최고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낭만파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연주자로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가 있다. 이탈리아 출신 니콜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는 신동으로 태어나 불세출의 기교를 구가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 8세 때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하고 16세 때 이탈리아 연주 여행, 46세 이후로는 베를린, 빈, 런던, 파리 등 유럽을 순회하며 ‘바이올린의 마왕’, ‘바이올린의 마술사’ 등으로 불리며 찬사를 받았다. 슈베르트는 책을 팔아 파가니니 공연의 입장권을 구입했으며, 그의 연주를 본 리스트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남아 있는 두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24개의 카프리스], 수많은 소나타와 2중주곡들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자유로운 형식 안에서 활기차게 움직이는 기교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비르투오조의 계보는 파가니니 이후 비에냐프스키, 요아힘, 사라사테 등 명 바이올리니스트들을 통해 이어졌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절정
낭만주의를 직접 받아들인 이탈리아 작곡가로는 조아키노 로시니(Gioacchino Rossini, 1792~1868)를 들 수 있다. 로시니는 달콤한 멜로디에 절묘한 리듬, 관능적이고 해학적인 스타일로 19세기 전반 오페라 분야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관현악법에 대한 이해가 그리 깊지 못했던 당시 오페라 작곡가들에 반해, 로시니는 관현악법을 꿰뚫고 있었으며 18세기 고전주의와 19세기 낭만주의 음악 스타일 모두를 겸비한 뛰어난 작곡가였다. 로시니 오페라를 특징짓는 귀족을 향한 풍자와 웃음, 생생한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 아름다운 벨칸토 창법은 이탈리아 오페라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다. [세비야의 이발사], [윌리엄 텔] 등 너무나도 유명한 오페라와 [도둑까치]와 같은 유명한 서곡은 활기 넘치고 원기 왕성한 로시니의 음악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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