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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의 이해

[스크랩] 낭만파 음악의 전성기

minjpm 2010. 8. 25. 12:54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18세기 중엽인 1760년대였다. 산업혁명의 여파는 1830년경 유럽 각지에까지 전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대도시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00년부터 약 80년 동안 런던과 파리의 인구는 네 배가량 증가했다. 음악의 생산과 소비 형태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었다. 음악은 더 이상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계층을 불문하고 티켓을 사면 음악회를 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기 시작했으며, 대도시로 모여든 대중들이 즐길 수 있는 음악들도 더 많이 생겨났다.

 

 


자연, 과거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 위에 꽃핀 낭만파 음악의 전성기


회색 도시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떠나온 고향을 그리며 향수병을 앓았다. 고향에 대한 향수는 곧 지나간 시간, 전원의 목가적 환경에 대한 향수였으며, 이러한 과거와 자연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는 같은 시기 낭만주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이러한 변화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팔레스트리나 같은 바로크와 르네상스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바흐는 1750년 사망했다. 이후 낭만주의의 전성기가 시작된 1820년대 후반까지 거의 80년 동안 바흐는 잊혀졌던 대작곡가였다. 동시대의 음악에만 흥미를 가졌던 고전과 낭만파 초기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낭만주의는 산업화 초기의 도시인들이 느꼈던 자연과 과거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포용하며 전성기를 맞는다.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의 거장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바다 건너편 달이 떠오르는 장면(Moonrise Over The Sea)], 1822년

 

 

 

전성기 낭만파 음악의 두 가지 흐름


바로 이 시기, 1820년대 후반부터 낭만주의 음악은 풍성한 수확을 자랑하며 전성기로 접어든다. 이즈음의 낭만파는 두 부류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 리트(Lied)를 작곡한 독일 작곡가 그룹으로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등을 꼽을 수 있다. 리트는 19세기 독일 낭만주의를 상징하는 장르다. 이들 작곡가들은 서정적 작풍의 아름답고 인상적인 소품을 즐겨 작곡했다. 이들은 고전파 시대에 완성된 형식인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와 같은 규격화된 형식에 작품을 담았는데, 이전 시대와 달리 그 그릇의 크기를 자유자재로 변형해 사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로 슈베르트 [교향곡 9번 ‘그레이트’]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과 같이 큰 규모의 작품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이들은 피아노 등 기악 소품이 발휘할 수 있는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형식을 사랑했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릭 쇼팽이 대표적인 경우다. 사실 쇼팽의 음악을 독일 낭만파 작곡가의 음악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비구성적인 측면, 자유로운 즉흥성과 순간적 감흥을 중시했다는 점에서는 서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흐름은 베를리오즈가 만들어낸 표제음악에서부터 리스트, 바그너로 이어지는 음악적 전통이다. 베를리오즈는 [환상 교향곡], [파우스트의 겁벌] 등의 표제음악을 새롭게 작곡했는데, 언어의 의미에 의존해 음악적 내용을 확장하고자 했다. 이러한 베를리오즈의 영향을 받은 프란츠 리스트는, 한발 더 나아가 고전파 형식에서 탈피해 표제만을 악곡의 중심으로 삼은 교향시 장르를 만들어낸다. 내용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담는 그릇까지 바꿔버린 것이다. [전주곡], [마제파], [프로메테우스], [오르페우스] 등이 그 대표적인 예로 이 작품들은 자유로운 교향시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리하르트 바그너는 시와 음악을 무대에서 융합한 새로운 음악극 즉, 악극이라는 형식을 그때까지의 오페라를 대신하는 양식으로 새롭게 창안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중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후 작품들을 대개 악극이라 부른다. 바그너의 악극은 무한선율이나 라이트모티프(시도동기)를 사용해 극 전체를 유기적으로 통일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이후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나 [엘렉트라] 등의 작품을 통해 계승되었다.

 

낭만파 음악의 스타일은 단정한 질서를 중시했던 고전파 음악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변화의 이면에는 악기 개량이라는 사건이 존재한다. 당시에는 관악기의 개량이 두드러졌다. 그렇다면 관악기가 발전적으로 탈바꿈한 이유는 무엇일까? 낭만파 음악의 특징 때문이다. 낭만파 음악은 다양한 감정들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표현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화성을 자유롭게 운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반음계적인 진행이나 조바꿈도 자주 일어났다. 악기는 이러한 낭만파 음악을 소화하기 위해 그에 근접한 성능을 갖춰야 했고, 목관악기나 금관악기는 키 조작이 개량되거나 밸브가 발명되는 등 큰 변화를 겪게된다. 개량 작업을 통해 악기의 음역이 확대되었고 더 다양한 연주법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피아노에 철선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도 1820년 경이었다.  이는 마치 새로 나온 게임이 더 높은 사양의 컴퓨터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악기라는 하드웨어의 더 높은 사양을 요구한 것이다. 그렇다면 전성기 낭만파를 수놓은 작곡가들은 누가 있을까?  

 

 

 

바흐의 재발견 - 고전주의적 낭만주의자 멘델스존

서두에서 낭만주의의 복고적 경향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이 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작곡가는 펠릭스 멘델스존이었다. 그는 바로크 시대 바흐 음악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한번은 멘델스존이 바흐가 생전에 칸토르와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하던 성 토마스 교회를 찾아 라이프치히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멘델스존은 우연히 정육점에 들렀는데, 정육점 주인이 고기를 싸는 데 사용하고 있던 종이가 범상치 않은 악보임을 발견했다. 바로 바흐가 작곡한 [마태수난곡]의 악보였던 것이다.

 

멘델스존은 즉시 종이 뭉치가 쌓여 있는 곳에서 바흐의 악보를 골라내어 이 위대한 인류의 유산을 재발견해냈다. 원래 [마태수난곡]은 성 토마스 교회에서 1727년 4월 11일 초연됐고 1736년 3월 30일에 같은 곳에서 재차 연주된 기록이 있지만, 라이프치히 이외의 지역에서는 1829년까지 연주되지 않았다. 1829년 멘델스존에 의해 거의 100년 만에 다시 베를린에서 연주된 [마태수난곡]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무렵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 팔레스트리나의 전기도 출간되었으며, 여러모로 과거 음악에 대한 흥미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1850년에는 바흐 전집 악보 출판이 기획되었고 1862년에는 팔레스트리나 악보도 제대로 출판되고 있었다.


멘델스존 탄생 200주년 기념 우표 <출처 : Deutsche Post AG>

 

멘델스존의 음악은 한 마디로, 고전주의적 낭만주의자, 혹은 낭만주의적 고전주의자의 음악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할아버지는 철학자, 아버지는 은행가, 어머니는 베를린 최고의 자산가 가문이었던 그는 고전음악계의 ‘엄친아’였다. 윤택한 환경 아래 유능한 가정교사들로부터 교육받으며 자란 그의 음악에는 균형 잡힌 세련된 감각과 고전적 전통이 느껴진다. 과부족이 없고 온화한 작품들을 많이 썼다. 그는 극 부수 음악 [한여름 밤의 꿈], 피아노의 노래인 [무언가집], [마태수난곡] 부활을 계기로 전통 지향의 모습을 보여준 오라토리오 [엘리야], [교향곡 4번 이탈리아], [피아노 트리오 1번] 등의 많은 걸작들을 남겼다.

 

 

 

낭만파 음악의 든든한 옹호자, 슈만


스스로 낭만적인 삶을 살았던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마다 의미 있는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쏟아내곤 했다. 1836년 클라라와 사랑에 빠지고 1837년 약혼했을 때, 그리고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 교수가 이들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했을 때, 슈만은 [교향적 연습곡 Op.3], [환상 소곡집 Op.12], [판타지 Op.17], [노벨레테 Op.21], [유머레스크 Op.20], [카르나발 Op.26] 등 걸작 피아노곡 작품을 작곡했다. 그 뒤 해를 거듭하며 점점 장르를 넓혀갔다. 클라라와 결혼한 1840년은 슈만에게 있어 ‘노래의 해’로 불릴 정도로 사랑스러운 가곡들이 샘 솟듯 쏟아져 나온 해이다. [미르텐 Op.25], [리더크라이스 Op.39], [여인의 사랑과 생애 Op.42], [시인의 사랑 Op.48] 등 슈만의 가곡집과 가곡은 낭만주의 성악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1841년에는 관현악곡에 집중해 [교향곡 1번 ‘봄’]을 초연하고 [교향곡 2번] 작곡에 착수했으며, 이듬해 클라라와 함께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남긴 현악 4중주를 연구하며 [피아노 5중주 Op.44], [피아노 4중주 Op.47] 등 실내악 작곡에 집중하기도 했다.

 

슈만은 작곡가, 그리고 음악 평론가로서
낭만파 음악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슈만이 창간한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ur Musik)]의 표지 모습
<출처 : Subitosera at en.wikipedia.org>

 

 

낭만파 음악이 후기 낭만과 20세기로 이어지기까지 슈만은 낭만파 음악의 든든한 옹호자이자 버팀목의 역할을 한 음악가였다. 슈베르트로부터 독일 리트의 전통을 이어받은 슈만은 기악곡 분야에서 특히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시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또한, 19세기 독일 음악계에서 표제음악이 시작되는 데 큰 공헌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당대를 호령한 평론가이자 편집자였다. [음악신보]라는 잡지를 창간한 슈만의 비평 활동은 베토벤을 하나의 큰 기둥으로 삼아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슈베르트, 쇼팽, 베를리오즈, 리스트 등 당대 작곡가들의 빼어난 점들을 적극 소개해 낭만파 음악의 번영을 위해 싸웠다. 1853년 작곡가 브람스와 만난 슈만은 브람스의 새로운 음악에 대한 비평과 찬사를 통해 브람스를 세상에 소개하며 비평활동의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과 파가니니의 센세이션


슈만과 함께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프레데릭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1849)은 낭만파, 아니 전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피아노 음악 작곡가 중의 한 명이다. 쇼팽은 씩씩한 기운과 우울하고 멜랑콜리한 감정의 양면성을 서로 대조시키며 별빛처럼 반짝이는 사랑스러운 감정을 피아노로 표현했다. 쇼팽의 특징은 조를 바꾸면서 변화하는 멜로디에 깃든 시적 감수성, 높은 수준의 기교를 요구하는 곡의 운영과 해석에 있다. 쇼팽의 피아노곡은 리듬이나 다이내믹 작용 또는 템포 루바토와 강약기호, 속도기호, 피아노 페달의 사용 등 연주자의 세심한 기교와 만날 때 놀랄만치 독창적인 억양과 색채감을 만들어낸다. 단적으로 말해, 슈만의 피아노 음악이 시어를 음악에 새겼다고 한다면, 쇼팽의 작품은 약동하는 음이 써내려 가는 즉흥시와도 같다. 그것이 쇼팽이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린 이유다.

 

폴란드 태생의 쇼팽은 파리에서 예술활동의 전성기를 일구어냈다. 당시 프랑스 파리는 유럽의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이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 위해 몰려들던 예술의 중심지였다. 파리 데뷔 연주회를 통해 최고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낭만파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연주자로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가 있다. 이탈리아 출신 니콜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는 신동으로 태어나 불세출의 기교를 구가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 8세 때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하고 16세 때 이탈리아 연주 여행, 46세 이후로는 베를린, 빈, 런던, 파리 등 유럽을 순회하며 ‘바이올린의 마왕’, ‘바이올린의 마술사’ 등으로 불리며 찬사를 받았다. 슈베르트는 책을 팔아 파가니니 공연의 입장권을 구입했으며, 그의 연주를 본 리스트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남아 있는 두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24개의 카프리스], 수많은 소나타와 2중주곡들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자유로운 형식 안에서 활기차게 움직이는 기교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비르투오조의 계보는 파가니니 이후 비에냐프스키, 요아힘, 사라사테 등 명 바이올리니스트들을 통해 이어졌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절정


낭만주의를 직접 받아들인 이탈리아 작곡가로는 조아키노 로시니(Gioacchino Rossini, 1792~1868)를 들 수 있다. 로시니는 달콤한 멜로디에 절묘한 리듬, 관능적이고 해학적인 스타일로 19세기 전반 오페라 분야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관현악법에 대한 이해가 그리 깊지 못했던 당시 오페라 작곡가들에 반해, 로시니는 관현악법을 꿰뚫고 있었으며 18세기 고전주의와 19세기 낭만주의 음악 스타일 모두를 겸비한 뛰어난 작곡가였다. 로시니 오페라를 특징짓는 귀족을 향한 풍자와 웃음, 생생한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 아름다운 벨칸토 창법은 이탈리아 오페라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다. [세비야의 이발사], [윌리엄 텔] 등 너무나도 유명한 오페라와 [도둑까치]와 같은 유명한 서곡은 활기 넘치고 원기 왕성한 로시니의 음악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 잡지에 실린 로시니의 캐리커쳐

도니체티가 직접 그린 자신의 캐리커쳐

 

 

로시니를 존경한 이탈리아 작곡가 가에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1797~1848)는 50년의 인생 동안 무려 67편의 오페라를 썼다. 무대 효과와 극적인 박력, 밝은 색채와 멜로디의 아름다움이 도니체티 오페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효과적이고 아름다운 벨칸토 창법과 여린 박자에 갑자기 악센트를 가하는 스포르찬도의 리듬을 즐겨 사용했다. 이러한 방식은 관현악법에 취약한 부분이 있더라도 청중들을 음악 속에 강하게 몰입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사랑의 묘약],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연대의 아가씨], [돈 파스콸레] 등은 오늘날 자주 공연되는 도니체티의 작품들이다. 로시니, 도니체티와 더불어 19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트로이카로 꼽히는 빈첸초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35)는 34세의 짧은 생애 동안 아름다운 멜로디 흐름, 대단히 어렵고 화려한 성악적 기교, 깊은 내용을 갖춘 걸작 오페라를 만들어냈다. 벨리니의 오페라는 단순하면서도 고전적인 기품과 낭만성이 가득 담겨 있는데 [노르마], [청교도], [몽유병의 여인] 등은 지금도 자주 무대에 오른다. 1820년대 무렵부터 번성한 낭만주의 운동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중기 낭만주의 음악은 이전의 고전적인 미학과 새로운 낭만성의 사이에서 어느 정도 중용을 지닌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다음 글에서는 후기 낭만주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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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형 / 전 <객석> 편집장, 음악 칼럼니스트
월간 <객석> 편집장 역임, 현재 (재)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거장들의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이 반복되는 삶이 마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다고 생각한다.

 

 

원문보기 : http://navercast.naver.com/classical/classicabc/3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