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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의 이해

[스크랩]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 - 파블로 카잘스

minjpm 2009. 9. 15. 12:23

본문에 삽입되어 있는 샘플 음원을 들으시려면, 본문 맨 아래 원문 링크로 가셔서 들어셔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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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동안 잠자고 있던 [무반주 첼로 조곡] 악보를 발견


1889년의 어느 날. 카탈로니아의 수도 바르셀로나(스페인)의 한 악기점 으슥한 구석에서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채 200년 동안이나 잠자고 있던 [무반주 첼로 조곡]의 악보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멘델스존이 발굴 초연한 [마태 수난곡]에 버금가는 위대한 발견이었다. 이 음악사상의 놀라운 ‘신대륙 발견자’는 바로 당시 13세의 소년 파블로 카잘스였다. 카잘스는 그 후 12년 동안의 집념 어린 연구와 피나는 각고 끝에 비로소 첫 공개 연주를 할 수 있었다  당시의 일을 카잘스 자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카잘스는 96세로 죽는 날까지 평생 매일같이 일과처럼 [무반주 첼로 조곡]을 연습했다. 그가 얼마나 신중했나 하는 것은 이 곡집 악보를 발견한 후, 연주 불가능한 부분을 수정 보완해 가며 40년 간에 걸쳐 체험과 연구를 거듭하고 나서 이윽고 레코드 녹음을 시작했다(1936~1939)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 녹음(SP)이 바로 전성기의 그의 생동하는 역사적 명연주를 들을 수 있는 EMI 레코드이다.


 

카잘스는 [무반주 첼로 조곡]의 발굴 소개와 그 해석의 전형 또는 전통을 이룩하는 위대한 업적을 아무의 도움도 빌지 않고 혼자 힘으로 해냈다. 오늘날 모든 [무반주 첼로 조곡] 연주의 정점에 높이 솟아 있는 카잘스의 연주는 그 생명력과 기술적 완벽성, 내부적인 통일의 높이와 깊이, 논리성과 즉흥성의 혼연일치 등에서 비길 자가 없다.

   

곡명  
1분 감상 - [무반주 첼로 조곡 1번 프렐류드] / 파블로 카잘스[첼로] (1938, EMI) 듣기
 

   

 

길고도 비범한 카잘스의 생애와 예술


파블로 카잘스는 그의 길고도 비범한 생애를 카탈로니아의 한 마을에서 시작했다. 그가 태어난 것은 1876년 12월 29일이었다. 아버지는 교회의 오르간 주자였다. 카잘스 소년은 11세가 되었을 때 이미 오르간, 피아노 그리고 바이올린을 배우고 나서 첼로로 전향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어느새 바하의 음악에 심취하고 있었다.

 

이 때를 회고하며 “바하는 모든 고귀한 감정을 음악에 옮기는 필연성을 느꼈던 시인”이라고 말한다. 훗날 그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 곧 바하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몇 분동안 연주하고 나서야 하루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그는 본격적인 공부를 위해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 입학했으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카훼 토스트’ 라는 카지노(술집 겸 도박장)에서 연주를 해야만 했다. 카지노이지만 연예나 춤을 위해 악사가 필요했다. 당시 카잘스 소년의 연주를 들은 한 단골 손님은 겁먹은 얼굴로 “그는 카지노라는 울타리를 콘서트 홀로 바꾸어 놓았고, 다시 나중에 그 콘서트 홀을 사원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윽고 카잘스는 스페인의 여왕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눈에 들어 궁중에서 연주 작곡해 달라는 초대를 받게 된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카잘스의 이름을 듣고 어전 연주를 부탁했다  그러나 너무도 어린 나이에 달콤한 성공의 맛을 본 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불안의 씨앗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대살육은 그를 자살 직전까지 몰고 갈 정도로 절망을 안겨 주었다. 드디어 카탈루냐로 돌아온 카잘스는 바르셀로나에 파우 카잘스 관현악단(‘파우’는 파블로의 카탈루냐식 호칭)을 창설하고 지휘를 맡았다. 카잘스는 이 오케스트라를 제1급의 앙상블이라 자부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장대한 악기”라고 자랑했다.


저 처참했던 스페인 내란 동안 카잘스는 열렬한 왕당파였다. 전쟁이 후랑코 독재 정권의 승리로 끝나자 남부 불란서의 쁘라드라는 인구 5,400명의 작은 마을로 망명했다. 여기서 그는 스페인으로부터 망명해 오는 난민 구제를 위해 있는 돈을 모두 털어 헌신적으로 일했다. 거의 10년 동안 세계는 파블로 카잘스의 연주를 들을 수가 없었다. 1947년 카잘스는 후랑코가 스페인을 지배하고 있는 한 공개석상에서 연주를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즉 후랑코의 스페인을 승인한 나라에서는 일체 연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상무장관이었던 스태포드 크리프스 경이 어째서 영국이 후랑코 정권을 승인했는지를 설명하겠다고 하며 카잘스를 영국에 초대하려 했으나 카잘스는 “그는 정치를 말할 속셈이지만 나는 모랄을 논하고 있는거야” 하며 응하지 않았다.

 

 

  

은둔 생활은 1950년, 즉 바하 사후 200주기를 맞이하여 끝이 난다. 쁘라드에서 개최하는 바하 음악제에 참가한 때문이었다. 그를 다시 이 세상으로 이끌어 낸 공로자는 부다페스트 4중주단의 제2바이올린 주자였던 알렉산더 슈나이더였다. 세계의 유명한 음악가들 - 요제후 시게티를 비롯하여 아이자크 스턴, 루돌후 제르킨 등이 카잘스와 협연하기 위해 피레네 산맥의 한 자락 밑 조그만 마을로 모여들었다. 전세계의 뉴스도 따라서 이곳으로 집중되었다.


6년 뒤인 1956년 12월에 카잘스는 어머니의 교향인 푸에르토리코를 영주의 땅으로 정하고 옮겨 간다  동생네 가족도 거기 살고 있었다. 그러자 푸에르토리코 정부는 잽싸게도 75,000달러의 예산으로 ‘훼스티벌 카잘스협회’(법인)을 설립했다. 훼스티벌을 후원하는 동시에 관광 사업 진흥을 도모한다는 일석이조의 기막힌 아이디어였다. 이 사업을 위한 선전문에는 “돈 카잘스는 숱한 관광객들과 마찬가지로 눈부신 태양빛 아래의 바닷가, 산업용 플랜트, 열대식물에 아름다운 배경을 제공하고있는 짙푸른 카리브 해 등에 매료되었다……”라는 글귀가 보인다. 여행사는 특별 할인 가격의 훼스티벌 여행을 발표했다. 콘서트 입장권은 순식간에 매진되고 음악제 전날에는 호텔이건 민박이건 산 후앙(San Juan)에는 빈방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음악제를 시작하기 6일 전, 슈베르트의 [제5교향곡]을 리허설하던 도중, 80세의 파블로 카잘스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서 지휘를 중단했다. 4월 16일 아침의 일이었다. 병명은 ‘심장 관상동맥 혈전증’이었다. 푸에르토리코 섬의 총독 루이스 무뉴스 마린은 심장병의 전문의이며 같은 병을 앓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주치의로서도 유명한 폴 더들리 화이트 박사를 급거 보스톤에서 불러 왔다  이 때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어” 하고 화이트 박사를 본 카잘스가 놀라며 말했다.
“선생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진찰하는 닥터가 아니십니까? 선생은 유명한 분인데……”
“하지만”하고 화이트 박사가 대답했다.
“마에스트로, 당신만큼은 유명하지 못합니다.”
“그렇지”

맞장구를 치고 나서 한참 동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카잘스는 “말씀하신 대로군요”하고 혼자말처럼 되뇌었다.

 

화이트 박사를 위시한 여러 의사들은 카잘스의 병세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3주간 절대 안정한 뒤 다시 3개월 정도 요양하면 그전처럼 연주 활동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카잘스의 측근이나 친지들은 노거장의 음악가로서의 생활도 이것으로 끝나지 않나 하고 염려했지만 얼마 후 의사의 낙관적인 진단이 옳았음을 카잘스 자신이 입증하기에 이른다.


여러 가지 면에서 1957년은 카잘스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해이다. 건강을 회복한 80노인은 방년 20세의 제자 마르티타 몬테스 양과 결혼을 한다. 카잘스는 둘 사이의 나이 차이에 대해 어색해 하며 “신랑이 장인보다 30세나 위인 경우는 흔치 않지”라고 말했다 한다.
카잘스는 늘 입버릇처럼 자기가 애용하는 첼로에 대해 “이건 나이를 먹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시대가 흐를수록 젊어져서 날씬해지고 섬세하며 우아해지는 아름다운 여성과 같애”하고 귀여운 연인처럼 말해 왔으나 역시 그도 인간인 이상 살아있는 연인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첼로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더 살펴 본다면, 카잘스가 애용한 첼로는18세기의 바이올린 제작자 카를로 베르곤찌의 작품이었다. 그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것은 “너무 개성이 강하다”고 해서 쓰지 않았다. 1957년 당시까지 카잘스는 베르곤찌를 반세기 동안이나 애용해 왔다. 젊은 아내를 맞이하여 100세까지는 문제없이 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카잘스는 그것을 못 채우고 96세에 갔다. 1973년 10월 23일, 푸에르토리코의 아우크시료 무토오 병원에서 36세의 젊은 아내를 눈여겨 바라보며…… . 몬테스와는 16년을 살았다. 임종의 자리에서 카잘스가 마지막으로 들은 음악은 역시 바하였다  평소 그가 ‘내 아들(My Son)’ 이라고 귀여워했던 피아니스트 유진 이스토민이 연주했다. 카잘스 부인인 몬테스가 요청했다고 한다.  카잘스가 죽은 2년 뒤 바로 이 49세의 노총각 이스토민과 카잘스의 젊은 미망인 마르티타(38세)는 결혼(1975년 2월초)했다. 그리고 아들과 같았던 사람과 아내였던 여인, 두 사람에 의해 ‘훼스티벌 카잘스’는 계속되고 있다.

 

 

 

첼로의 성서 [무반주 첼로 조곡]

 

흔히 바하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바이올린의 성경이라고 한다면 [무반주 첼로 조곡]은 첼로의 성서라고들 한다. 전자가 바이올린이라는 여성적이며 섬세한 악기로 그토록 다채롭고 풍성한 복선율의 음악을 만들어 냈다면, 후자는 첼로라는 풍요한 저음부를 지닌 대형 현악기의 낭랑한 음색을 활용하여 더욱 다양하고 견실한 음의 건축물을 완성했다.

 

[무반주 첼로 조곡]은 어느 한 곡을 접해도 불과 단 한 개의 악기를 사용했을 뿐이지만, 그 반음의 좁은, 그러나 독특한 음정으로 낭만적이고도 턱없이 넓고 큰 음악의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 보여준다. [무반주 첼로 조곡]은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와 마찬가지로 전 6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각 곡은 그 구성이 규칙적이며 당시 인기 있었던 ‘조곡’의 표준적 배열을 따르고 있다.

 

바하는 당시 첼로의 음색이 어둡고 차분하기 때문에 소나타 형식을 택하지 않고 무곡을 모은 조곡 형식으로 썼으리라고 한다. 그러나 바하 시대의 첼로는 아직 반주 악기 정도의 용도 밖에 없었으므로 그런 악기로 이토록 풍성한 음악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은 그저 경이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각 곡은 다음과 같은 6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번 : G장조  전주곡,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메누엣, 지그

제2번 : D단조  전주곡,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메누엣, 지그


 

제3번 : C장조  전주곡,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부레, 지그. 전 6곡중 가장 인기 있는 곡이다. 특히 [부레]가 뛰어나다. C장조의 제1부레와 C단조의 제2부레로 되어 있으며 2부 형식이다.


제4번 : E플랫 장조  전주곡,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부레, 지그. 이 곡에서는 [부레]와 [지그]가 유명하여 단독으로도 연주되는 일이 많다.

 

제5번 : C단조  전주곡,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가보트, 지그.  이 곡은 화음 및 그 밖의 연주를 쉽게 하기 위해 제1현을 한 음 낮춰 G로 조현하도록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음색에 빛이 부족하게 되므로 카잘스가 보통 조현으로 연주하는 편이 좋다고 하여 오늘날은 그대로 카잘스를 따르고 있다. 연주하기는 훨씬 더 어려워지지만 이 곡의 웅장한 스케일과 깊은 정감의 표현은 커다란 감동을 안겨 준다. 그 중 사라방드는 듣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제6번 : C장조  전주곡,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가보트, 지그. 바하 시대에 있었던 5개의 현을 지닌 특수한 악기를 위해 작곡된 곡이며 아주 높은 고음역의 소리와 그 밖의 여러 가지 보통 첼로로는 연주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래서 뛰어난 곡임에도 불구하고 연주되는 기회가 적지만 카잘스의 오랜 연구의 결과로 오늘날과 같은 연주가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고도의 기교가 필요하다. 특히 다이내믹한 변화로 이루어진 전주곡과 장중한 사라방드는 감동적이다.

 

 

 

 

 

 

원문보기 : http://navercast.naver.com/classical/masterpiece/1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