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이 풀어헤친 머리에 벗은 발로 들판을 헤매고 있었다. 정신을 반쯤 놓아버린 채 누군가의 이름을 애처롭게 부르는 그녀는 뜻밖에도 데메테르였다. 원래 데메테르는 만물의 어머니이자 대지의 여신인 당당한 지모신(地母神)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목숨처럼 귀히 여기던 딸을 잃어버린 슬픔에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가엾은 어미일 따름이었다. |
미친 듯이 들과 산을 헤매던 데메테르는 우연히 땅의 갈라진 틈에서 딸 페르세포네가 하고 있던 허리띠를 발견했다. 이는 페르세포네의 아름다움에 반한 명부의 왕 하데스가 대지를 갈라 그녀를 지하세계로 납치해가는 와중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그제야 딸이 명부에 있음을 깨달은 데메테르는 분노해 외쳤다.
“천하에 다시없는 배덕하고 잔인한 대지여. 내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만물을 소생케 하고 열매를 맺어 후손을 보도록 살펴 주었는데, 너는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구나. 그 음험한 틈을 열어 내 딸을 빼앗아 갔으니 나도 더는 네게 호의를 베풀지 않겠다. 이 대지 위에서 다시는 어떤 생물도 소생할 수 없을 것이고, 어떤 어미도 더는 자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서슬 퍼런 분노 앞에 대지는 무참히 말라갔고, 그 위에서 생을 이어가던 모든 생명체도 속절없이 스러져갔다. - 그리스 신화 중에서 ‘딸을 잃은 데메테르의 슬픔’ 중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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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테르의 신화, 자식 잃은 어머니의 서슬퍼런 분노
신화 속 데메테르는 딸을 잃은 슬픔과 노여움으로 모든 것을 놓아버립니다. 딸에 대한 사랑의 깊이만큼 그녀의 분노 역시 깊었지요. 결국 말라 죽어가는 대지와 생명을 보다 못한 신들은 하데스를 설득해 페르세포네를 내놓게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지하 세계의 음식을 먹어 그곳을 완전히 떠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있었지요. 신들의 왕 제우스는 페르세포네에게 일 년 중 아홉 달은 지상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지만, 나머지 석 달(그녀가 먹은 것은 석류 세 알이었습니다)은 명부로 돌아가야 한다는 판결을 내립니다. 데메테르는 어쩔 수 없이 이 판결을 받아들이지만, 딸이 지하 세계로 돌아가야 할 시기가 다가오면 그녀는 다시금 대지에 대한 보살핌을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합니다. 신화는 이때부터 대지가 얼어붙는 ‘겨울’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느끼는 사랑의 생물학적 근원은?
이만하면 다 컸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습니다. 슬슬 부모님의 관심과 보살핌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하더군요. 나도 이제 다 컸는데 왜 나를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 인정해주지 않고 아직도 엄마 치마폭에 싸인 아이 취급을 하시는 건지. 자식은 부모의 분신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라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지를 의아해했지요. 하지만 그런 의문을 품었던 시절의 두 배만큼의 나이를 먹고, 제 자신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 되고 나니 부모님들의 그런 행동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의 입장이 되고 보니 아이와 나를 따로 떼어 생각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오늘은 부모가 아이에게 느끼는 감정의 생물학적 근원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엄마에게 자식은 마약보다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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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무조건 예뻐 보인다는 것이죠. 생물학자들은 자식에게 쏟는 부모의 절대적인 애정의 근원을 뇌와 호르몬의 상관관계로 이해합니다.
쥐를 이용한 동물 실험에서 출산 전후 뇌에서 도파민 수치의 변화가 관찰되었다고 합니다. 어미 쥐가 출산 이후 새끼 쥐와 접촉하면 이것이 신호가 되어 뇌의 도파민 수치가 상승합니다.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은 뇌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 중 하나가 고양감-기분 좋은 느낌-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연구팀을 쥐를 이용해서 하나의 시험을 했습니다. 그림에서처럼 세 구획으로 나뉜 상자의 가운데 칸에 쥐를 넣고, 오른쪽에는 코카인(도파민을 분비시켜 쾌감을 느끼게 하는 대표적인 약물)을, 왼쪽에는 새끼들을 넣어 쥐가 어느 쪽에 더 관심을 보이는지 관찰했습니다. | |
보통 이 상자 안에 쥐를 넣어두게 되면, 쥐는 주로 코카인이 있는 오른쪽 방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출산 초기의 쥐라면 다릅니다. 출산 초기에는 새끼들은 코카인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어미를 끌어당기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이후 이어진 연구를 통해 새끼와의 접촉은 어미의 뇌에서 도파민을 분비시키기 때문에 새끼가 강력한 유인 요소가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008년에 미국의 연구팀은 아이의 웃는 얼굴은 엄마의 뇌에서 도파민 분비를 증가시켜 엄마를 행복하게 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도파민이 자녀에 대한 애정의 원인이라는 사실은 약물에 중독된 엄마들이 종종 아기를 방치하는 이유도 설명해 준다고 합니다. 약물에 중독되면 약물 자체가 도파민 신호를 독점하기 때문에 아기로 인한 도파민 신호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해 아기에 대한 애착도가 떨어진다는 것이죠.
엄마와 아빠를 만드는 호르몬,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
도파민 외에도 부모가 되게 하는 물질은 또 있습니다. 바로 옥시토신입니다. 옥시토신(oxytocin)은 그리스어의 ‘빨리 태어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듯이, 원래 자궁의 근육을 수축시켜 진통을 일으키고 젖 분비를 촉진하는 호르몬입니다. 따라서 출산 시 다량으로 분비되지요. 임상에서는 옥시토신의 이런 특징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출산을 유도하는 유도분만제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과학자들은 출산 시 분비량이 늘어나는 옥시토신이 자궁뿐 아니라 뇌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습니다.
쥐를 이용해 실험한 결과에 따르면, 새끼를 낳아본 적이 없는 처녀 쥐에게 옥시토신을 주입하면, 이들은 남의 새끼들을 보듬고 나오지도 않는 젖을 물리며 이들을 보살피는 모성 행동을 보인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엄마의 몸속에 옥시토신의 양이 늘어나면 엄마의 모성 행동과 아기에 대한 애착 형성도가 비례해서 늘어나는 것이 관찰되었다고 합니다. 옥시토신은 진통을 유도하고 젖 분비를 자극하여 엄마의 몸이 신체적으로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갓 태어난 아기에게 모성애를 느끼고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전천후 출산-육아 관련 호르몬인 셈이죠. | |
이처럼 출산 과정에서 분비되는 옥시토신은 ‘여성’을 ‘엄마’로 바꾸어주는 역할을 하는 호르몬입니다. 그렇다면 출산의 과정을 겪지 않는 남성들은 어떻게 해서 자식에게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최근 연구 결과, 남성의 경우에는 아내의 출산을 전후해 몸속의 바소프레신 수치가 높아지는 것이 관찰되었습니다. 바소프레신은 원래 체내의 수분량을 조절하기 위해 소변의 배설량을 증가시키는 호르몬인데, 옥시토신과 유사한 분자 구조를 가지고 있지요. 설치류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바소프레신의 증가와 새끼의 출산과 연관되는 경우에는 영역을 지키고 새끼를 보호하기 위한 공격성의 증가와 함께, 새끼와 보내는 시간이 더 늘어나는 부성 행동의 증가를 보여줍니다. 즉, 출산을 기점으로 호르몬의 변화는 남성 역시 ‘아빠’로 변신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이의 탄생을 전후해서 부모에게서는 정신뿐 아니라 신체에서도 변화가 일어나 부모의 길을 걷게 합니다.
호르몬의 지배를 넘어서는 것이 과연 ‘인간다운’ 것일까?
지난 크리스마스이브, 한 어린 생명이 차가운 건물 복도에 버려졌다가 착한 사마리아인들의 도움으로 생명의 끈을 이을 수 있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이 아기는 건강을 회복했지만 여전히 부모의 소식을 알 수 없다는 추가 소식도 보도되었지요. 우리는 흔히 인간이라면 ‘생물학적 본능’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이렇게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 때마다 차라리 본능에 충실한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소한 동물이라면 본능적인 호르몬 신호에 따라서 추운 겨울, 갓 태어난 새끼를 보듬어 안아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지금이라도 부모가 자신의 몸이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 |
- 글 이은희 / 과학저술가
-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 [과학 읽어주는 여자], [하리하라의 과학 블로그] 등 많은 과학 도서를 저술하였고, 2003년에 과학 기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연세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과학기술학 협동 과정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
원문보기 : http://navercast.naver.com/science/biology/1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