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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핵분열 - 중성자와 원자의 충돌

minjpm 2010. 5. 7. 13:33

원자와 원자핵의 구조를 밝혀낸 러더퍼드를 비롯한 물리학자들은 원자의 구조를 밝혀낸 것이 인류가 이루어낸 가장 큰 과학적 업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원자핵의 구조를 알아내기 위한 실험에 가장 자주 사용되었던 실험도구는 헬륨 원자가 바깥쪽을 도는 두 개의 전자를 잃어 양성자 두 개와 중성자 두 개로 이루어진 원자핵만 남은 알파입자였다. 특히 러더퍼드는 알파입자를 이용하여 수많은 실험을 했다. 그는 종종 알파입자를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불렀다. 방사성 원소에서 나오는 알파입자는 매우 빨라서 다른 입자를 파괴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러더퍼드는 자신의 오른팔인 알파입자를 이용해 원자핵을 발견했고, 양성자도 발견했다.

 

 

원자의 구조를 밝히기 위해 많은 사람이 알파입자를 실험 도구로 사용했다

알파입자를 실험에 이용한 사람은 러더퍼드뿐만이 아니었다. 1933년에 파리에서는 이레느(Irene Joliot Curie, 1897~ 1956)와 프레드릭 졸리오 퀴리 부부(Frederic Joliot-Curie, 1900~1958 )가 알파입자를 알루미늄에 쏘아 방사성 동위원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최초의 인공방사성동위원소였다.

 

퀴리 부인으로 더 알려진 마리 퀴리와 그의 남편 피에르 퀴리는 1903년에 천연 방사성 원소에 대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마리 퀴리는 1911년에 폴로늄라듐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한 번 더 받았다. 그들의 딸과 사위인 이레느와 프레드릭 졸리오 퀴리 부부도 1935년에 인공적으로 방사성 원소를 만들어낸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헬륨-4의 원자핵인 알파입자는 원자핵의 구조를 밝히기 위한 실험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도구였다.

 

 

양전하를 가진 원자핵 대신, 페르미는 중성자를 가지고 원자핵 실험을 하였다

그러나 가장 자주 사용하던 알파입자는 원자핵 실험에 그다지 적당한 도구가 아니었다. 알파입자는 플러스 전하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플러스 전하를 띤 원자핵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원자핵에 알파입자가 아닌 다른 입자를 쏘아 넣는 실험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로마대학의 엔리코 페르미 (Enrico Fermi, 1901~1954)는 원자핵에서 방출되는 전자를 이용한 실험을 시작했다. 그러나 크기가 작은 전자로는 별다른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다음에는 양성자로 실험을 시작했다. 하지만 양성자 역시 플러스 전하를 가진 원자핵에 가까이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자 페르미는 원자핵에 중성자를 쏘아 넣는 실험을 시작했다.

 

중성자는 전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원자핵에 의해 반발 되지 않는다. 따라서 중성자는 손쉽게 원자핵 속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러더퍼드는 중성자는 너무 느려서 원자핵을 변환시키는 작용을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느린 중성자가 빠른 중성자보다 더 쉽게 원자핵에 흡수된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중성자는 전기적인 반발력을 겪지 않으므로 원자핵에 다가가는데 속도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빠른 중성자는 원자핵을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가지만 느린 중성자는 쉽게 원자핵 속에 잡혔던 것이다. 페르미는 그가 실험할 수 있는 모든 원소에 중성자를 쏘아 넣는 실험을 시작했다. 이런 실험을 통해 페르미는 40가지가 넘는 새로운 방사성 물질을 만들어냈다.

 

 

페르미의 중성자 실험, 우라늄 원자핵을 분열시켰다

원자핵 실험에 중성자를 이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페르미는 자연에 존재하는 가장 무거운 원소인 우라늄 원자에 중성자를 쏘아 넣는 실험을 하기로 했다. 그는 우라늄보다 더 무거운 초우라늄 원소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가 우라늄 원소를 향해 중성자를 쏘아 보내자, 중성자 일부가 우라늄 원소에 의해 흡수되었다. 중성자를 흡수한 우라늄 원자핵은 불안정해져서 크게 흔들리다가 붕괴하였다. 페르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자핵 분열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원자핵에 중성자를 쏘아 넣어 더 무거운 원소를 만드는 실험에 온갖 신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큰 원자핵을 작은 조작으로 분열시켰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사용하던 시험기구로는 우라늄 원자핵이 분열할 때 나오는 작은 원자핵을 찾아낼 수 없었다.

 

페르미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음에도 중성자를 이용한 페르미의 실험은 원자핵에 대해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준 실험이었다. 1938년에 페르미는 중성자를 이용한 핵반응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독일에서도 마이트너와 한, 스트라스만이 중성자를 이용한 실험을 하였다

페르미와 같이 중성자를 통한 연구는 독일에서도 진행되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 물리학자로 마리 퀴리에 감동하여 물리학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은 리제 마이트너 (Lise Meitner, 1878~ 1968)는 빈 대학으로 진학하였다. 빈 대학에서 루드비히 볼츠만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를 한 후, 베를린 대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러 간 그녀는 그곳에서 막스 플랑크의 지도를 받았다.

 

이때 만난 친구가 오토 한(Otto Hahn, 1879~1968)이다. 세세한 부분에 관심이 많은 화학자였던 오토 한과 큰 아이디어에 관심이 많은 마이트너는 좋은 파트너가 되었고, 두 사람의 공동 연구는 거의 3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마이트너와 한 연구팀은 방사능 연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수많은 방사성 동위원소를 발견했고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중성자를 이용한 페르미의 연구를 들은 리제 마이트너는 1938년에 그녀의 친구이며 동료연구원이었던 오토 한과 프리츠 스트라스만(Fritz Straβmann, 1902~1980)에게 중성자를 우라늄 원자핵에 충돌시키는 실험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페르미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무거운 초우라늄 원소가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한과 스트라스만은 우라늄보다 훨씬 가벼운 원소인 바륨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만들어진 것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당시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스톡홀름에 있었던 리제 마이트너에게 한은 이 사실을 알렸다.


중성자를 이용한 핵분열 실험을 한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
한과 함께 핵분열에 대한 연구를 하였지만, 노벨상을 받지는 못하였다.

 

 

중성자를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원자핵을 두 조각으로 나누었다

스웨덴에 있던 마이트너 역시 한의 실험결과를 전해 듣고는 매우 놀랐다. 마이트너는 이 실험 결과에 대해 조카이며 물리학자였던 오토 로버트 프리쉬(Otto Robert Frisch, 1904~1979)와 의견을 나누었다. 큰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중성자가 큰 원자핵을 둘로 쪼갠다는 것을 이해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원자핵이 물방울같이 행동한다고 했던 보어의 설명을 생각해 냈다. 그들은 중성자를 흡수한 원자핵이 불안정해져서 흔들리다가 가운데 잘록한 부분이 생겨 두 조각으로 갈라졌을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한과 스트라스만이 중성자를 이용하여 원자핵을 두 조각으로 분열하는 실험에 성공했던 것이다.

 

한과 스트라스만은 서둘러 그들이 우라늄을 분열시켜 바륨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몇 주일 후 마이트너와 조카 프리쉬는 [중성자를 이용한 우라늄의 분열: 새로운 형태의 핵반응]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핵분열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우라늄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바륨크립톤 같은 작은 원자핵으로 분열된다. 마이트너는 우라늄 원자핵이 작은 원자핵으로 분열할 때 2억 전자볼트나 되는 엄청난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을 계산을 통해 밝혔다.  

 

느리게 움직이는 중성자를 흡수한 우라늄은 불안정해지면서, 바륨과 크립톤으로 분열한다.(왼쪽),
마이트너, 한 그리고 스트라스만이 원자핵의 분열을 관찰했던 실험 기구를
뮌헨에 있는 박물관에 재현하여 전시하고 있다.(오른쪽)

 

 

 

1944년 한의 노벨상 수상, 그리고 뒤에 남은 마이트너와 스트라스만

이 연구 업적으로 1944년에 오토 한이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전쟁 때문에 그는 1946년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상을 받을 수 있었다. 한은 마이트너와의 공동연구를 부인했다. 원자핵 분열을 발견하고 나서 얼마 동안 한이 마이트너와의 공동연구를 부인한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망명자인 마이트너와 공동으로 연구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의 직업은 물론 생명도 위험해질 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한은 마이트너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은 마이트너가 자신의 조수로서 자신의 실험을 보조하는 일만 했다고 주장했다. 마이트너는 한이 너무 자주 핵분열 발견의 공로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자 그가 정말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이트너가 한과의 관계를 단절하기에는 그와 함께 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마이트너는 오토 한이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자신과 스트라스만도 그런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공헌을 잘 알고 있는 동료가 자신의 공헌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한 것은 그녀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이트너는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을 공개적으로 불평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는 다른 단체가 플랑크 메달, 페르미 메달과 같은 상들을 줬다. 그것은 그의 동료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세상은 그녀가 한 일을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주요 용어 설명

  1. 엔리코 페르미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1901~1954)는 이론 물리학과 실험 물리학 양쪽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보기 드문 과학자이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38년 중성자를 이용한 새로운 방사능 원소의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미국에서는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수많은 방사성 원소를 발견한 페르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원자번호 100번 원소의 이름을 페르뮴으로 명명하였다.

  2. 리제 마이트너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878~1968)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물리학자이다. 빈 대학에서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서 오토 한과 핵분열에 대해서 공동 연구를 하였다. 유대인이라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스웨덴, 노벨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서 연구를 계속하였으나, 여성,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계속 차별을 받았다. 공동연구자 한이 마이트너와의 공동연구를 부정하여 노벨상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막스 플랑크 상이나 엔리코 페르미상을 받았다. 원자번호 109번의 마이트너륨은 마이트너의 선구적인 작업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곽영직 / 수원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터키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수원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이다. 쓴 책으로는 [과학이야기] [자연과학의 역사] [원자보다 작은 세계 이야기] 등이 있다.

 

 

원문보기 : http://navercast.naver.com/science/physics/2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