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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의 이해

[스크랩] 고전파 음악 - 고전파와 모차르트& 베토벤

minjpm 2010. 7. 13.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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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와 낭만파 사이,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는 고전파 시대는 절대주의의 끝물에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왕정복고에 이르는 급격한 변혁의 시기였다. 에스테르하지가의 궁정악장으로 생의 대부분을 보낸 하이든과는 달리 모차르트는 최후 10년간을 빈에서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했으며, 베토벤도 귀족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독립해 자유로운 예술가의 생활을 했다. 이들이 궁정과 교회의 높은 벽을 떨치고 나아가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여물어가는 시민사회에서 새로운 음악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지구 위의 인간으로서 ‘나’를 자각한 예술혼 앞에는 낭만주의의 여명이 비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음악 권력의 이동

모든 시대를 통틀어 오케스트라의 변화는 권력의 변화, 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높은 궁정의 담을 넘어 퍼져 가지 못했다. 칸타타는 교회 안에서 울렸고 민초들이 사는 야외에서는 마을 악대 정도가 아마추어의 솜씨로 민요를 연주했다.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러 음악의 후원자는 귀족과 성직자에서 점차 식민지를 통해 막대한 자본을 쌓은 신흥 부르주아로 옮겨 가고 있었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을 이끈 혁신적인 증기기관과 제철 산업, 직물 기술의 발달이 이를 견인했다.


바로크 시대 초기 오페라의 대표적인 작곡가 몬테베르디는 17세기 초 오페라 [오르페오](1607)에서 15종류, 38개의 악기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쳄발로나 오르간 등 건반악기와 더불어 바이올린 등 현악기, 트럼펫과 트롬본 등 금관악기가 사용됐다. 이후 여러 가지 개혁을 거쳐 바로크 초기와 중기에는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제1비올라, 제2비올라, 베이스(첼로, 더블베이스)로 이루어진 현5부제가 만들어졌고, 그 뒤로는 제2비올라가 빠진 현4부제가 대세였다. 현재 오케스트라 기본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이렇게 4종으로 구성하는 현4부제이다. 목관악기는 당초 악기 종류도 일정치 않았다. 목관악기의 개량은 실로 수없이 많이 이루어졌으며, 고전파를 관통하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그 모양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처음 오케스트라에 포함된 목관악기는 오보에와 바순이다. 다음이 플루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라리넷이 추가되었다.

 

독일의 만하임 궁전. 만하임 궁정 악단은 18세기 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오케스트라였다.

 

 

현재 오케스트라의 기본인 2관 편성은 18세기 후반 모차르트나 하이든에게 큰 영향을 미친 독일의 만하임 궁정 악단을 중심으로 확립되었다. 바이에른의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 아래에서 활약한 만하임 악파요한 슈타미츠(1717~1757)를 지휘자로 하는 우수한 관현악단을 조직하여 연주와 관현악곡의 작곡 등 양면에 걸쳐 공헌했다. 작곡상의 업적으로는 교향곡의 3악장에 미뉴에트를 둔 4악장 구성의 확립, 크레센도나 피아노와 포르테의 대비 등 다이내믹 효과의 추구, 관악기(특히 클라리넷)의 중점적인 사용 등을 들 수 있다. 연주 면에서는 정연한 운궁법, 정확한 음량변화 등을 통해 온 유럽에 그 명성을 떨쳤다. 2관 편성은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을 각각 2개씩 한 상으로 하고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4종의 현악기군을 추가한 것을 기본으로 한 편성이다. 이것에 금관악기와 타악기가 추가되면서 기본적인 오케스트라 편성이 완성된다. 금관악기 중에는 호른이 가장 먼저 똬리를 틀었고 트럼펫에 이어 19세기에 들어 트롬본이 자리를 잡았다. 베토벤이 자신의 교향곡에 트럼본을 첨가한 것은 늘어난 청중과 확대된 연주회장의 규모 때문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부르주아들의 음악적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대도시의 교외에 천막을 치고 음악회를 개최한 야외 음악회가 열릴 수 있었던 것도 악기의 음량이 큰 역할을 했다. 팀파니는 필수 타악기 중에서 유일하게 자리매김했다. 이로써 베토벤 시대 고전적인 오케스트라 편성이 확립되었다.


오케스트라 편성이 나온 김에 이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자. 1관 편성은 목관악기의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을 한 개씩 두며, 현악기는 보통 20명 안팎으로 편성한다. 3관 편성은 대편성으로 목관악기가 각각 3개씩이며 전체 연주 인원의 수가 60명 정도로 이루어져 연주한다. 현대 오케스트라 음악은 보통 3관 편성으로 연주된다. 4관 편성은 총 인원이 100명 이상으로 목관악기는 각각 4개를 사용하며, 호른은 6개나 8개 정도 사용된다. 스트라빈스키말러의 교향곡에서 찾아볼 수 있는 편성이다.

 

 

 

고전파 시대의 성악 – 나폴리 악파

고전파 이전 오페라의 지존은 헨델이었다. 헨델은 영국에 귀화한 뒤 영국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가만히 살펴보면 헨델은 개혁적이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형식을 잘 활용한 수많은 오페라들을 남겼다. 헨델은 오페라 속에서 아리아를 잘 관리했다. 아리아를 통해 순간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 묘사하면서 전체 음악적 구조를 아울렀다. 여기에 이탈리아풍의 벨 칸토 양식과 독일적인 힘찬 심리 묘사를 단순하고 명쾌한 형식 속에서 결합시켰다. 18세기 이탈리아에서는 나폴리 악파가 오페라의 전성기를 열고 있었다. 피렌체 악파의 한 줄기를 이루는 로마 악파가 창시하고 발전시킨 오페라는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다가 17세기 말에 베네치아 악파의 영향을 받은 나폴리 작곡가들의 새로운 양식에 의해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 악파와 대비되는 나폴리 악파는 17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중적인 호모포니의 경향 속에서 발생해 구세대 유산인 보수적, 대위법적, 귀족적인 오페라를 대신해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베네치아 악파의 영향에서 출발한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를 나폴리 악파 최초의 작곡가로 보며 페르골레시, 굴리엘미, 피치니, 파이지엘로, 치마로사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이탈리아 각지와 유럽에 나폴리 양식의 오페라를 소개했다.


나폴리 악파의 대표적인 작곡가 파이지엘로. ‘오페라 부파’ 분야에서는
모차르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폴리 악파에 의해 아리아(노래)와 레치타티보(대사를 말하듯 노래함)의 두 스타일은 분명히 분리되어 레치타티보에서는 극적인 전개가 이루어지며 정서표현은 아리아에서 나타났다. 그 결과로 여러가지 아리아의 형태가 생겨났으며, 오페라에서 아리아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초절기교를 가진 스타 가수가 환영받아 점차로 가수의 기교 과시를 위한 오페라로 그 형식이 변화해 갔다.


나폴리 악파의 영향은 오페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여러 성악과 기악 양식에도 그 영향이 나타났다. 나폴리 악파가 즐겨 쓴 서곡은 ‘빠른-느린-빠른’이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었고, 이것은 이탈리아풍의 서곡으로 불리며 고전파 교향곡의 중요한 모체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나폴리 악파는 아리아를 지나치게 중시한 결과 오페라에 극적인 요소가 부족해지고 가수의 기교에만 치중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 비판의 선두에 선 사람이 글루크였다. 글루크는 가수 만능의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항해 음악은 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가수가 기교를 과시하거나 필요 이상의 음악적 장식을 하는 것을 배제했다. 또한 표현력이 풍부한 레치타티보나 오케스트라, 또는 코러스 등을 통해 단순하고 자연스런 표현 속에서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시도를 했다.

 

 

 

고전파의 ‘양박’ 모차르트와 베토벤

월드컵 기간에는 밥공기도 축구공으로 보인다. 월드컵을 보면서 고전파 원고를 쓰다 보니 축구와 음악가를 결부짓게 된다. 고전파의 두 거두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우리나라 국가대표 축구팀의 ‘양박’이라 불리는 박주영, 박지성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연하면서도 천부적이고 창의적인 박주영의 플레이는 모차르트 음악과 닮았고, 주장으로서 듬직한 믿음과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돌파하는 불굴의 강렬함을 보여준 박지성은 베토벤 음악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단지 월드컵 기간에만 일어나는 마법같은 착각일까. 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한 두 작곡가의 음악에 대해 알아보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1756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태어났다. [장난감 교향곡]의 작곡가로도 유명한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부악장까지 역임했다. 레오폴트는 훌륭한 교육가였다. 모차르트보다 다섯 살 연상 누이인 마리아 안나(난네를)에게 쳄발로를 가르치던 레오폴트는 아들의 재능을 깨닫게 된다. 모차르트는 음악에 열중하면 다른 것에는 일체 흥미를 갖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다섯 살 때 모차르트는 잉크를 흘리며 작곡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단지 아들의 재능에 감탄만 하고 있지 않았고 재능을 넓게 키워주기 위해 유럽 여행을 떠났다.

 

여섯 살 모차르트는 뮌헨으로 3주 동안 여행했다. 그 후 빈과 파리, 런던, 이탈리아를 방문했고 그 여행은 1762년 1월부터 10년동안 계속되었다. 빈 쉔부른 궁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이 자리에서 모차르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프로포즈를 하기도 했다), 런던에서 조지 1세 앞에서 즉흥 연주를 하고 12세의 나이에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았다. 이후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악사가 된 모차르트는 근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의 모차르트 초상화.

 

천진난만한데다가 음악에 열중하면 다른 것은 모두 잊는 아이와 같은 성격, 일상적 생활능력은 전무했지만 음악에 있어서는 천재였던 모차르트는 작곡가, 바이올린 연주자로 대주교의 궁정에 5년간 근무했다. 대주교는 그 사이 파리를 다녀오는 등 궁정 직무에 충실하지 못한 모차르트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서거로 빈에 조문을 가게 된 대주교와 동행한 모차르트는 결국 빈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25세의 모차르트는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빈에 머물며 걸작을 남겼다.

 

빈에서의 첫 5년 동안 모차르트는 순조롭게 자유를 만끽했다. 피아노 연주자로 명성을 떨치며 연주회를 자주 열었고,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실내악을 차례로 발표했다.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레슨을 했다. 그러나 훌륭한 스승이 아니었던 모차르트는 재능있는 제자들만 좋아했다. 제자들이 하나 둘씩 줄어들었다. 그는 더 이상 유행을 따르지 않고 관객을 위한 곡을 만들지 않았다. 청중들은 줄어들고 모차르트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모차르트는 도박을 좋아했고 아내 콘스탄체는 가계를 잘 못 꾸리는 불량주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귀족의 담장 안에서 벗어나 자유 음악가로 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면서도 1787년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를 완성하고 1788년에는 3대 교향곡이라 불리는 [교향곡 39번], [40번], [41번]을 어디서 연주하겠다는 목표도 없이 단숨에 완성한다. [돈 조반니], [마술피리]등 걸작 오페라도 1787년 이후 완성되었다.


그러나 궁핍한 생활 속에서 모차르트의 몸은 날로 쇠약해져 갔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쓰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는 [레퀴엠]은 미완성으로 끝나 제자 쥐스마이어가 완성했고 [마술피리] 첫 공연이 대성공을 거두고 두 달 후, 모차르트에 대한 평판이 점차 나아지고 있던 차에 모차르트는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 가족의 연주회.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아버지 레오폴드,
노래하는 누이 난네를과 쳄발로 앞의 어린 모차르트.

 

그의 죽음을 두고 ‘살리에리 독살설’, ‘프리메이슨 제거설’, 각종 병사설 등이 항간에 떠다녔다. 현재로서는 만성적인 위염이 모차르트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바람이 몹시 거칠게 부는 12월에 열렸다. 부인 콘스탄체마저도 마지막을 지키지 못해 결국 모차르트의 유해는 찾을 수가 없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770년 독일 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은 궁정 예배당 가수로, 클라비어를 가르치며 생계를 꾸려갔고, 베토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궁정 악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베토벤 역시 어려서부터 풍부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지만 모차르트 정도는 아니었고, 아버지 요한 역시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같은 뛰어난 교육가는 아니었다. 오히려 주벽이 있었던 요한은 아들을 이용해 돈을 벌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778년 베토벤이 여덟 살 때 여섯 살이라고 속이고 연주회에 출연시킨 것만 봐도 그렇다.

 

베토벤은 선천적으로 약하고 키가 작아 나이를 두 살 속여도 그럴 듯했다 전해진다. 점차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어진 요한은 우연히 만난 좋은 스승 네페(1748~1798)에게 아들의 교육을 맡겼다. 네페는 베토벤에게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과 C.P.E 바흐의 소나타를 가르쳤다. 네페의 도움으로 14세의 베토벤은 궁정 오르간 연주자의 조수로 고용될 수 있었다.


1787년 베토벤은 자신보다 14살 연상인 모차르트 곁에서 공부하기 위해 빈을 방문했다. 그러나 당시의 모차르트는 [돈 조반니]와 3대 교향곡 작곡으로 바빴고, 베토벤 역시 빈에 도착한지 2주도 되지 않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본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모차르트의 제대로 된 가르침은 받지 못했지만, 모차르트가 베토벤의 즉흥연주를 듣고 “언젠가 세상은 그를 화제로 삼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니라고 추측된다.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과 어머니 마리아의 초상.
아버지 요한은 궁정 예배당의 가수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은 심해져 갔다. 17세의 베토벤은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두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2년 동안 작곡을 못하던 베토벤은 발트슈타인 백작과 피아노 교사로 인연을 맺게 된 브로이닝가 사람들의 우정 속에 재기할 수 있었다. 1792년 본을 방문한 하이든은 베토벤의 재능을 인정하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하이든의 제자로 어렵게 빈에 온 22세의 베토벤은 야망에 불탔고, 62세의 스승 하이든은 자신의 작품을 정리하느라 겨를이 없었다. 하이든 곁에서 대위법을 배우기 시작한 베토벤은 자신의 실수에 별 신경 안 쓰는 하이든의 지도를 불신하게 되었고, 몰래 다른 스승의 가르침도 받다가 1794년 하이든을 떠난다. 그러나 이 와중에 베토벤은 빈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었으니 분명 베토벤은 하이든 덕을 봤다고 하겠다.


1798년경부터 귀가 안 들리기 시작한 베토벤은 점점 까칠한 사람이 되어 갔다. 그의 집에서 4주 이상 버틴 가정부가 없었다고 한다. 피아노 건반도 난폭하게 두들겼다. 귀가 안 들리는 건 작곡가로서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괴로웠던 베토벤은 1802년 10월 빈 근교에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썼지만 우체통에 넣지는 않았다. 이후 베토벤은 불굴의 의지를 발휘한다. 이 해에 [교향곡 2번]과 [피아노 소나타] ‘템페스트’를 비롯한 3개의 피아노 소나타 등을 작곡하고 이후 끊임없는 걸작들을 만들어냈다. [교향곡 3번] ‘에로이카’를 포함해 1803년 이후 10년동안 [교향곡 5번] ‘운명’ [6번] ‘전원’ 등 6개의 교향곡을 완성한다.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산책하는 베토벤의 모습.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자필본. 베토벤은 청력 상실에 절망하며 유서에 비장한 각오를 남겼지만 자살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많은 귀족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가족으로부터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불멸의 연인’에게 편지를 썼다.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베토벤은 친구들과 싸울 때도 격렬했다고 한다. 일찍 죽은 동생의 아들이었던 조카 카를의 친권을 가지고 제수(영화에서는 이 여인이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으로 그려졌다)와 다툰 것은 베토벤의 평판을 안좋게 만들었다. 카를은 머리 좋고 예의 바른 소년이었지만, 베토벤의 과도한 애정과 기대를 못견디고 1826년 권총 자살을 감행한다. 미수로 끝났지만 베토벤은 엄청난 추궁을 당했다. 이듬해 1827년 3월 26일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57세의 베토벤은 불쑥 몸을 일으켰다가 오른손을 높이 치켜든 채 숨을 거둔다. 베토벤의 장례식에는 2만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고 한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이들 고전파의 ‘양박’은 후원자로부터 자립하여 국제적 연주여행을 통해 적극적으로 청중의 확대에 힘썼다. 베토벤의 경우에는 후원자에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새로운 시민의 대표로서 전 인류를 향해 음악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음악가의 자의식이 과해짐으로써 음악가와 청중 사이의 거리감이라는 새로운 관계도 만들어냈다. 앞서가는 음악을 작곡한 모차르트와 베토벤 모두 대중과의 거리감으로 피해를 입은 예술가였다. 현악 4중주 등에서 베토벤 작품이 난해해진 것도 음악가의 아이덴티티를 찾은 것에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고전파 시대의 청중들은 독창적인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기존 소리의 질서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도 감정적 호소라는 알맹이에 더 끌리게 된다. 이는 고전주의 내부의 붕괴가 시작된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낭만주의로 이행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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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형 / 전 <객석> 편집장, 음악 칼럼니스트
월간 <객석> 편집장 역임, 현재 (재)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거장들의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이 반복되는 삶이 마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다고 생각한다.

 

 

 

원문보기 : http://navercast.naver.com/classical/classicabc/3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