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jpm(민제이피엠) 의 음악과 함께하는 삶~
SOUL CLAMP

클래식의 이해

[스크랩] 오케스트라 교실 - 인용음악

minjpm 2010. 8. 25.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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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550년 전, 엄숙한 미사가 진행되고 있는 프랑스의 한 성당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성가대가 초기 르네상스 음악의 거장, 기욤 뒤페(Guillaume Dufay, 1397~1474)의 거룩한 미사곡을 노래하는 동안, 신도들은 다성부 합창곡의 최고 경지를 보여주는 이 완벽한 미사곡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신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는군요. 이렇게 훌륭하고 엄숙한 음악을 들으면서 그는 왜 웃음을 터뜨렸을까요? 아마도 그는 성스러운 미사곡 속에서 점잖지 못한 유행가 선율을 발견해냈나 봅니다.

 

 

 

뒤페의 미사곡, ‘표절’이라 할 수 있을까?

뒤페의 미사곡 [무장한 병사] 중 ‘천주의 어린양’을 음반으로 들으면서 오랜 옛날, 이 곡이 처음 연주됐을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보았습니다. 마치 숨은 그림을 찾아내듯 테너 성부에 숨어 있는 작자 미상의 유행가 ‘무장한 남자’의 선율을 찾아 따라 부르며, 뒤페의 미사곡에서 이 유행가 선율을 발견해낸 당대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생각해봅니다. 이 노래는 그 당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곡이었다고 합니다. “무장한 남자를 경계하시오. 모두들 철갑옷으로 무장하라고 말하네”라는 가사의 노래인데, 이런 유행가를 성스런 미사곡의 재료로 쓰는 것이 과연 괜찮은 일일까요? 게다가 이미 존재하는 선율을 가지고 작곡을 했다면 그건 표절이 아닐까요?

 

사실 550년 전의 작곡가에게 표절 시비를 걸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표절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작곡가라면 모든 음을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의를 하신다면 할 말은 없지만, 작곡가의 능력이 단지 선율을 창조하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니지요. 오히려 주어진 선율을 가지고 어떻게 변화시키고 어떻게 장식하고 어떻게 구성해나가느냐 하는 것이 작곡에 있어 더 중요한 문제일 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아는 유명한 선율을 가지고 분위기가 전혀 다른 새로운 음악을 작곡해내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노래인데…
뒤페의 미사곡, 과연 ‘표절’이라 할 수 있을까?
<출처: NGD>

 

기존 선율을 가져다가 음악작품에 사용하는 일은 뒤페의 시대엔 흔한 일이었습니다. 기존에 존재해왔던 민요, 유행가나 성가 선율을 이용해 작곡한 미사곡을 ‘정선율 미사곡’이라 불렀는데, 이런 종류의 음악은 르네상스 시대에 무척 유행했습니다. 그래서 ‘무장한 남자’의 선율을 바탕으로 곡을 만든 작곡가도 여러 명입니다. 그들은 똑같은 선율을 가지고 저마다의 개성을 담은 새로운 음악을 작곡해내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곡기법을 과시했습니다.

 

 

 

기존 선율에 작곡가의 개성을 담아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인용’

혹시 여러 관현악곡들을 듣다가 똑같은 선율이 여러 작곡가의 작품에 나타나서 어리둥절했던 경험이 있다면 이 작품들에 모두 똑같은 옛 노래가 인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중세의 성가 [심판의 날(Dies Irae)]을 예로 들어보죠. 이 곡은 죽은 자를 위한 미사인 레퀴엠의 일부로 심판과 죽음을 나타내는 선율인데, 이 유명한 중세의 성가는 여러 음악작품들 속에 살아남아 죽음과 심판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심판의 날] 선율을 사용한 대표적인 곡이 바로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뜨겁게 사랑했으나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자 애증으로 괴로워하던 [환상교향곡]의 주인공은 환각상태에서 여인을 죽이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교향곡의 마지막 5악장에서 온갖 마녀와 유령들이 벌이는 광란의 파티를 목격합니다. 그야말로 죽음 이후의 무시무시한 지옥의 세계가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지요. 이때 어두운 음색을 지닌 관악기인 바순과 튜바가 심상치 않은 멜로디를 연주하는데, 이 선율이 바로 중세의 성가 ‘심판의 날’입니다. 이 선율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5악장을 들으면서 금방 죽음과 심판의 이미지를 떠올릴 겁니다.

 

[심판의 날] 선율을 사용한 작곡가는 베를리오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리스트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죽음의 무도]의 도입부를 [심판의 날] 선율로 시작해 음악의 첫 부분에서부터 압도적이고 무시무시한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라흐마니노프 역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에서 [심판의 날]을 인용해 죽음을 암시했고, 말러는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는 [교향곡 제2번]의 5악장에서 [심판의 날]의 첫 네 음을 인용해 죽음과 심판을 암시했으니, 중세의 성가 [심판의 날]은 19세기 이후 작곡가들 사이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 선율이 아닐까 싶습니다.


중세의 성가 [심판의 날]은 여러 음악작품들 에서 인용되며 죽음과 심판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심판의 날’을 묘사한 그림.
<출처: Quantumobserver at en.wikipedia.org>

 

no 아티스트/연주  
1 베를리오즈의 [심판의 날] 인용 -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5악장 / 샤를르 뮌슈, 파리 관현악단, 1967 듣기
2 리스트의 [심판의 날] 인용 - 리스트 [죽음의 무도] / 프리츠 라이너, 시카고 심포니오케스트라, 1959 듣기
3 말러의 [심판의 날] 인용 - 말러 [교향곡 제2번] / 브루노 발터, 뉴욕 필하모닉오케스트라, 1958 듣기

 

 

 

민요를 인용한 드보르작과 인용기법을 애용한 작곡가 말러


옛 성가뿐만 아니라 오랜 민요 선율을 인용하는 것 역시 작곡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작곡기법입니다. 특정 나라의 민요를 인용하는 것만큼 민족적인 분위기를 나타내기에 좋은 방법도 없으니까요. 드보르작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는 그 좋은 예가 됩니다. 체코의 작곡가인 드보르작은 미국의 뉴욕음악원으로부터 제안을 받아 몇 년간 미국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신대륙에서 생활하는 짧은 기간 동안 드보르작은 [교향곡 9번]과 [첼로협주곡] 등 그의 대표적인 걸작들을 내놓았습니다. 아마도 신대륙의 광활함과 참신한 매력이 그에게 영감을 전해주었나 봅니다. 드보르작은 신대륙에 머무는 동안 미국 음악의 원천이 된 인디언의 노래와 흑인영가를 열심히 연구한 후 그의 아홉 번째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지요. “이 곡은 나의 이전 작품들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번 작품에서 미국의 영향을 알아볼 것이다.”

 

드보르작의 말대로 그의 [교향곡 9번]의 곳곳에서 미국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1악장에서 플루트가 낮은 음역에서 고요하게 연주하는 선율은 어딘지 흑인영가 풍으로 느껴지는데, 그건 아마 이 선율의 첫 부분은 흑인영가 [Swing low sweet chariot]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일 겁니다. 애절한 잉글리시 호른의 선율이 흐르는 느린 2악장은 헨리 롱펠로우의 서사시 [하이어와서(Hiawatha)의 노래]에서 분위기와 비슷하고 밝은 분위기의 3악장은 인디언 무곡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드보르작인 교향곡 9번에서 사용한 인용기법은 모두 기존 선율을 노골적으로 인용하기보다는 분위기만 암시하고 있어서 좀 더 세련된 인용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no 아티스트/연주  
1 Branda Lee [Swing low sweet chariot] 듣기
2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 1악장 / 이스트반 케르테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66 듣기
3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 2악장 / 이스트반 케르테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66 듣기

일부 음원은 9월 03일까지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음원제공 : 소니뮤직

 

 

작곡가 말러는 특히 인용기법을 애용했던 작곡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옛 노래나 다른 음악작품에서 모티브를 빌어다 쓰기를 좋아했고, 때때로 자신의 작품에서도 모티브를 끌어다가 마치 세포를 증식하듯 모티브의 자가 복제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작곡에 대한 말러의 생각은 조금 특이했습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하기도 했어요. “작곡이란 행위는 벽돌쌓기와 같습니다. 같은 벽돌로 자꾸만 새로운 빌딩을 만드는 거죠. 그 벽돌들은 오랜 옛날부터 항상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말러에게 있어 기존에 존재해왔던 선율은 마치 한 장의 벽돌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벽돌, 즉 기존선율은 그것이 존재해온 세월만큼이나 축적된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에 음악작품에 구체적인 의미를 담고 싶어 했던 말러에게 있어 기존선율은 매우 훌륭한 재료가 되어주었습니다.

 

말러가 그의 교향곡에 인용한 기존 선율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아마도 [교향곡 제1번] 3악장에 인용한 [마르틴 수사(Bruder Martin)]가 아닐까 싶군요. 이 노래는 어릴 때 누구나 한 번쯤 불러본 적이 있는 대표적인 돌림노래라서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마르틴 수사님,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나요? 새벽종이 울려요. 딩동댕~” 말러는 이렇게 즐겁고 재미난 노래를 우울한 단조로 비틀어 [교향곡 1번] 3악장의 도입부에 인용했습니다. 게다가 이 선율을 현악기 중에서 가장 낮고 어두운 소리를 내는 더블베이스 솔로로 연주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이 즐거운 노래가 어두운 단조의 장송행진곡으로 변형됐을 뿐 아니라 평소 독주를 거의 하지 않던 더블베이스로 연주하다니! 그야말로 소름이 오싹할 정도로 기괴한 느낌의 음악입니다. 즐거운 노래를 이상한 장송행진곡으로 변형시킨 이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기쁨과 슬픔,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을 하나의 음악 속에 담아낸 말러 음악 특유의 이중성을 느끼게 됩니다.

 

말러는 [교향곡 제1번] 3악장에서 경쾌한 돌림노래 [마르틴 수사]를 소름이 오싹할 정도로 기괴한 느낌의 장송행진곡으로 변형시켰다.
말러에게 이러한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진 모리츠 폰 슈빈트의 판화. <출처: FordPrefect42 at en.wikipedia.org>

 

no 아티스트/연주  
1 [Frere Jacques] (‘마르틴 수사’의 멜로디) 듣기
2 말러 [교향곡 제1번] 3악장 / 브루노 발터, 바이에른 주립오케스트라, 1950 듣기

일부 음원은 9월 03일까지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음원제공 : 소니뮤직

 

 

오랜 역사를 통해 많은 작곡가들에게 사랑받아온 인용기법 덕분에 우리는 그들이 남긴 음악작품의 의미에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곡가가 인용한 선율의 기원을 찾다 보면 작곡가의 의도를 깨닫게 되니까요. 이제 음악작품에서 인용기법이 이토록 자주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여러 작품에서 똑같은 멜로디가 들려와도 이상하게 생각지 마세요. 그럴 땐 그 작품에 혹시 인용된 선율이 있는지 알아보고 그 기원과 의미를 찾아보세요. 그러면 음악을 듣는 재미는 몇 배로 더 커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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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규 / 음악 평론가, [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는가]의 저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및 동대학원 석사, 박사과정 수료하고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부수석 및 기획홍보팀장을 역임했다. 월간 <객석> 및 <연합뉴스> 등 여러 매체에서 음악평론가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의 전당, 부천필, 풍월당 등에서 클래식 음악을 강의하고 있다.

음원 제공 소니 뮤직

 

 

 

원문보기 : http://navercast.naver.com/classical/classicabc/3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