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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물결 가운데 스페인의 음악계는 일종의 섬과 같았고, 20세기 접어들 무렵에야 비로소 지난 19세기의 축소판으로나마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거장의 시대인 19세기에 대해 스페인은 그다지 커다란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천재 작곡가 후안 크리소스토모 데 아리아가(Juan Chrisostomo de Arriaga, 1806~1826)가 교향곡과 현악 4중주, [스타마트 마테르]를 작곡하여 놀라운 천재성과 개성을 보여주었는데, 만약 그가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스페인의 19세기 음악사를 바꾸어놓았을 것이라는 역사의 가정형만이 아쉽게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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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레가 –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 존 윌리엄스[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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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까지 무료로 전곡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음원제공 : 소니뮤직 | |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스페인의 민족주의 음악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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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에서는 아리아가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은 채 19세기 후반의 스페인은 여전히 암흑기를 걷고 있었지만, 기악 연주 부문에서는 몇몇 괄목할 만한 인물들이 등장하며 스페인 음악계의 새로운 여명기를 탄생시키고 있었다. 비르투오소 연주자로 국제적으로 활약한 최초인 인물인 페르난도 소르와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헤수스 데모나스테리오, 엔리케 아르보스, 파블로 데 사라사테 등과 같은 소수의 인물들, 그리고 첼리스트인 파블로 카잘스와 기타리스트 안드레스 세고비아 등의 젊은 세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페라는 이탈리아에게, 교향곡은 독일에게 지배당하고 있을 무렵, 르네상스 시대의 영화로움을 되살리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부흥 운동이 19세기 중엽부터 여러 지방을 중심으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카탈루냐에서 안젤모 클라베(Anselmo Clavè)에 의해 근로자합창협회가 조직되었고, 이러한 운동은 이후 스페인 음악학 연구의 창시자인 펠리페 페드렐(Felipe Pedrell, 1841~1922)에 의해 계승되었다.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스페인 작곡가인 빅토리아의 작품으로부터 각 지방의 민요들까지를 모두 연구하여 스페인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제자인 그라나도스, 데 파야, 알베니스 등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고, 이러한 민족주의적 음악 운동의 반대편에는 카탈루냐에서 한 동안 지낸 바 있던 뱅상 댕디(Vincent D'Indy)와 같은 프랑스-바그네리안들 덕분에 바그너라는 막대한 영향력 또한 스페인에 공존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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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영혼을 되살린 타레가
프란시스코 타레가(Francisco Tárrega, 1852~1909)는 19세기 후반의 스페인을 대표하는 기타 작곡가이자 20세기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현대적인 연주법을 완성한 위대한 연주가이기도 하다. 그는 시대를 대표하는 비르투오소로서 경이적인 테크닉과 낭만적인 연주 스타일 덕분에 일명 ‘기타의 사라사테’로 불리우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는 기타라는 악기를 통해 세계적인 인지도를 한 몸에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오랜 동안 다른 악기에 밀려 사라질 운명에 놓였던 기타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해냈다. 특히 그는 신체적인 문제 때문에 생의 마지막 9년 동안은 손톱이 아닌 손끝의 살로만 현을 튕기는 새로운 주법에 매진하기도 했다.
한편 작곡가로서 그는 1880년대부터 1903년에 이르는 20여년 동안 베토벤과 쇼팽, 멘델스존, 베르디, 바흐와 같은 거장들의 음악을 기타로 편곡하거나 현대적인 테크닉을 완성하기 위한 연습곡을 작곡하여 이전과는 다른 혁신적인 테크닉과 확장된 표현력, 새로운 음향을 이끌어냈다. 연주가로서 기타 소리를 더욱 맑게 울려퍼지게 하고 풍부한 울림을 이끌어냈던 것이 고스란히 작품에 반영된 타레가의 작품들은, 20세기의 위대한 기타리스트로 칭송받는 나르시소 예페스의 말대로 동시대 및 후대의 기타 거장들과 현격하게 구분되는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와 더불어 그의 많은 편곡 작품들 덕분에 기타 레파토리 또한 급격히 넓어지게 되었다는 점 또한 그의 선구자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단순히 악기 자체에 쏠려있지만은 않았다. 그의 친구인 알베니스의 영향으로 스페인의 민속적 요소들을 낭만주의적인 감수성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호타’와 같은 스페인 고유의 무곡을 주제로 한 많은 기타 작품과 알베니스의 피아노 작품 편곡들을 꼽을 수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서 낭만주의 음악의 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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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궁전 알함브라에 드리워진 추억
타레가가 발전시킨 트레몰로 주법이 그 신비로움과 애절함을 더하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그가 그라나다를 방문했을 시 접한 알함브라 궁전을 보고 받은 감동을 기타로 옮긴 것이다. 이 궁전은 에스파냐에 존재했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왕조의 무하마드 1세 알 갈리브가 13세기 중반에 세우기 시작했으며 증축과 개보수를 거쳐 완성된 것으로서, 현재 남아있는 궁전의 모습은 대부분 14세기에 완성된 것이다. 특유의 인공미는 물론이려니와 자연과의 조화 또한 일품으로서, 그 아름다운 때문에 이슬람 문화의 결정체로 일컬어지는 알함브라 궁전은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비극적인 운명을 지니고 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그 해, 스페인의 페르난드 2세의 공격을 막지 못한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왕 보아브딜은 이 궁전을 평화적으로 내어주고 아프리카로 떠난 것이다. 그리하여 스페인은 비로소 근대 국가로의 이행을 걷게 되었지만, 알함브라 궁전에는 이전 800여년 간 내려온 이슬람 문화의 찬연함을 간직한 채 홀로 오롯이 서있게 된 것이다.
트레몰로 주법이 자아내는 그 애잔한 분위기와 낭만성 넘치는 멜로디 라인은 이러한 알함브라 궁전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음악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일설에 따르면 작곡가의 개인적인 사건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1896년 타레가는 그의 제자인 콘차 부인을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타레가의 사랑을 거부했고 실의에 빠진 타레가는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이 알함브라 궁전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달빛이 드리워진 이 궁전의 아름다움을 따라 자신의 사랑을 떠올리며 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작곡했다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영화 [킬링 필드]의 주제가로 사용되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이 아름다운 명곡을 들으며 자신의 추억이나 옛사랑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몹시 메마른 가슴을 가진 사람임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만큼 낭만적인 작품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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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박제성 / 음악 칼럼니스트,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 역자
-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써 온 음악 칼럼니스트 공연, 방송, 저널활동, 음반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미지 TOPIC / corbis
음원 제공 소니 뮤직
원문보기 : http://navercast.naver.com/classical/masterpiece/2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