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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의 이해

[스크랩] 클래식 입문 - 바로크 시대의 악기와 음악가들 2

minjpm 2010. 4. 25. 22:24

악기의 경우, 보통 크기가 첼로 이상이 되면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다. 비행기를 탈 때도 첼로석을 사서 두 사람 몫을 내야 한다. 피아노나 오르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휴대하기 가장 좋은 악기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목소리, 성악이다. 바로크 시대까지 음악의 전달은 대개 성악을 통해 이루어졌다. 음악가들이 만드는 곡은 미사, 샹송, 마드리갈 등 모두 성악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에도 성악으로 노래하면서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악기의 종류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담당 악기, 즉 ‘성악을 위한’ ‘바이올린을 위한’ ‘건반악기를 위한’ 곡들이 만들어지던 시절은 바로크 시대에 와서야 가능해졌다.

 

 

 

수많은 악기와 음악 형식의 발전이 이루어지다

특정 악기가 연주할 레퍼토리가 많아졌다는 사실은 끊임없이 그 악기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부여해 주었다는 얘기도 된다. 악기를 제작하는 기술도 점점 진보하며, 악기는 더 나은 성능을 향해 개량을 거듭했다. 개량의 방향은 보다 큰 음, 즉 볼륨의 확대와 보다 많은 음역, 즉 리지스터(register)의 확대로 향했다. 현재 클래식 음악의 필수 악기인 바이올린과 첼로가 만들어졌고, 오르간과 쳄발로(하프시코드, 클라브생 다 같은 말)가 완성된 것도 바로크 시대이다.

 

특히 건반악기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피아노의 발명자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가 최초의 피아노를 만든 것은 18세기 였다. 교회음악 분야에서 수많은 명곡을 남긴 바흐는 오르간 연주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개조, 제작에 많은 조언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679년까지 현악기 장인 아마티 밑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던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수많은 명기들을 제작하던 때도 이 때이다. 스트라디바리의 라틴어 이름인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은 1698년에서 1725년까지 만들어졌는데, 1715년경이 그 절정기로 여겨진다. 스승 아마티와 제자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주세페 과르네리 등 3인이 제작한 현악기는 세계 최고의 명성을 갖고 있다.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건반악기인 하프시코드의 모습

 

기악이 날로 발달함에 따라 기악곡의 각종 유형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바로크 시대가 진전됨에 따라 악보에 악기 편성이 확실하게 명기되었다.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의 오르간 주자였던 가브리엘리가 1597년 완성한 [4성부 2중 앙상블을 위한 피아노와 포르테의 소나타]에는 악기의 종류가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러 대의 악기로 연주하는 합주나, 하나의 악기만으로 연주하는 독주 스타일, 실내악과 관현악이라는 형태도 점차 완성되었다. 훗날 소나타와 협주곡 등의 음악 형식도 이 당시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18세기 들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기악은 독자적인 지위를 확립하며 나중에 고전파로 계승되게 된다.

 

바로크 시대에 이뤄진 음악적인 발전은 여러 개의 악기 그룹들 간의 대비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러한 음악적 대조의 생각들은 합주 유형으로 남게 되었다. 목관악기와 현악기의 대조는 물론, 작은 그룹이나 개별적인 연주자들과 거대한 음악적 그룹의 조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형식은 나중에 협주곡(concerto)으로 발전했는데, 바로크 시대에는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합주 협주곡에서는 작은 그룹들이 큰 그룹에 묻혀서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합주 협주곡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곡들은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일 것이다. 브란덴부르크 후작을 위해 작곡된 이 곡은 일례로 5번에서 현악기에 대조를 이루어 플루트와 바이올린, 그리고 건반악기가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합주 협주곡에서 작은 그룹의 연주는 오로지 현악기만을 포함하고 어떤 경우에는 건반악기까지 포함하곤 했었다. 이외에 코렐리와 헨델의 합주 협주곡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합주 협주곡은 점차 그 모습이 사라지고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등을 위시해서 점차 독주 협주곡으로 변화해 갔다.

 

뛰어난 바이올린 명기를 제작한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유명한 ‘바로크 3총사’와 작곡가들


바로크 시대 독일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영국(독일 출신이지만)의 프레데릭 헨델,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비발디를 흔히 ‘바로크 3총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 3인이 남긴 작품들의 중요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은 이보다 훨씬 많았고, 지금도 계속 그 진가가 발굴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르페오]와 [율리시즈의 귀환]이라는 걸출한 오페라를 남겼던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이탈리아, 1567~1643), 25세에 로마 교황청 성 베드로 대성당 오르간 연주자로 취임했던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이탈리아, 1583~1643), 드레스덴의 궁정악장으로 [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 [누가 수난곡] 등을 남긴 종교음악의 거장 하인리히 쉬츠(독일, 1585~1672), 바흐 이전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칸토르를 맡았던 요한 헤르만 샤인(독일, 1586~1630), 할레 태생의 오르간 연주자로, 쉬츠, 샤인과 함께 독일의 3대 S로 불린 자무엘 샤이트(독일, 1587~1654)도 유명한 바로크 작곡가이다.

 

또한 뤼베크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활약했으며, 스무 살의 바흐가 그의 연주를 들으러 찾아간 일화가 유명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독일, 1637~1707), 현악 합주곡의 권위자이자 협주곡과 소나타의 발전에 공헌한 아르칸젤로 코렐리(이탈리아, 1653~1713), 나폴리파 오페라의 중심인물인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이탈리아, 1660~1725), 그의 아들이자 탁월한 쳄발로 작품을 남긴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이탈리아, 1685~1757), 하모니 면에서 뛰어났고 음악 이론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대기 만성형으로 50세가 넘어 작곡가로 인정받았던 장 필립 라모(프랑스, 1683~1764), 그 외에 오페라에 관심이 많았지만 걸작 기악곡들을 많이 남긴 헨리 퍼셀(영국, 1659~1695), 프랑수아 쿠프랭(프랑스, 1668~1733), 줄잡아 3000곡이 넘는 곡을 작곡한 다작의 게오르그 필립 텔레만(독일, 1681~1767) 등등 바로크 음악 작곡가로서 음악을 들어보아야 할 사람은 참으로 많다.

 

 

 

프랑스 왕궁과 영국의 바로크 음악

루이 14세가 군림하던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는 1년 내내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궁정 예배당에는 프랑수아 쿠프랭(쿠프랭 가는 독일의 바흐 가문같은 명문 음악가 집안이었다.)과 같은 뛰어난 건반악기 주자가 고용돼 있었다. 프랑스 오페라의 창시자 륄리는 1661년부터 지휘봉에 발을 찧어 사망하는 1687년까지 왕궁 음악을 담당하는 음악감독직에 있었다. 륄리는 왕의 총애를 받고 코메디 발레 [서민귀족] 등을 작곡해 프랑스 오페라의 기초를 쌓았다. 륄리는 악기의 연주를 독립적인 하나의 형식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베르사유 궁전의 큰 홀에서는 왕과 왕비만을 위한 실내 음악회와 무도회가 열렸다. 경사나 축제가 있을 때는 당시 제1급의 음악가가 곡을 만들고 연주했다.

 

영국은 어떨까. 1649년 청교도 혁명과 그후 11년간의 공화정치로 음악의 형태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공화정치 중 왕실 예배당이 폐쇄되었고, 왕실악단은 해산했다. 한때 오락적인 이미지가 강했다는 이유로 극장도 폐쇄됐다. 그러나 콘서트는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계급에서는 풍성한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왕실 악단이 해산되어 일자리를 잃은 음악가들이 생계를 위해 간 곳은 시민들의 가정에 음악교사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음악이 왕과 귀족 뿐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 침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음악을 가볍게 즐길 줄 아는 일반 시민 계급이 육성되어 나간 것이다. 이 시대에 영국 최고의 음악가 헨리 퍼셀이 태어났다.


루이 14세와 프랑스 바로크 음악, 춤을 다룬 영화 [왕의 춤]

 

1672년에는 세계 최초의 음악회 신문 광고가 런던 가제트에 게재되었다. 단돈 1실링의 입장료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프롬나드 콘서트’가 성행했다. 영국에서 음악은 사회 각 계층이 누릴 수 있는 문화로 확산됐다. [메시아]를 작곡한 후기 바로크 거장 헨델도 왕실을 위한 축제음악을 만들면서 프롬나드 콘서트를 위한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런던에서 음악가는 다양한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고민을 해야 했다. 왕실을 위한 음악과 시민들을 위한 음악을 동시에 만들어야 했던 것이 바로크 시대 런던에 거주한 작곡가들의 고민이었다.
 

 

 

베를린에 생긴 ‘커피숍 1호점’과 음악회

독일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에 속했지만, 황제는 선거로 선출되었고, 그다지 큰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프랑크푸르트나 뉘른베르크 등은 자유도시라고 불렸다. 선거가 행해지고 최초의 제국회의가 개최된 도시로서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북쪽의 함부르크와 라이프치히 등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도시들의 힘도 꽤 강력했다. 제국 전체는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들의 모임 같은 인상을 주었다. 독일의 남부에는 가톨릭, 중부와 북부에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분포해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 종교 개혁가인 마르틴 루터는 신학 다음으로 음악을 중시했다.

 

특히 북부 프로테스탄트 도시에서는 교회 안의 훌륭한 오르간과 뛰어난 음악이 신앙의 증거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했다. 클래식 음악 사상 최고의 거장 중 하나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도 바이마르 등에서 오르간 연주자 겸 음악가로 활약했다. 바흐는 영국으로 귀화한 헨델과는 달리 평생 독일을 떠난 적이 없었다. 음악가로서 교회, 궁정, 자치도시에서 각종 일자리를 맡아 종사했다. 38세 때부터는 번성한 자치도시인 라이프치히로 옮겨서 살았다.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도시 음악감독으로 시내 주요 교회의 예배음악과 시의 공식행사 음악을 만들고 지휘를 맡기도 했다.


바로크 시대에 바흐보다 훨씬 인기가 많았던 작곡가 텔레만

 

당시 라이프치히에는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이라고 불리는 라이프치히 대학 학생들로 구성된 연주단체가 있었다. 멤버는 약 40명이었고 상당히 높은 수준의 연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콜레기움 무지쿰은 수많은 음악가들의 산실이기도 했다. 콜레기움 무지쿰의 활약이 눈에 띈 것은 독일 바로크 후기의 유명한 작곡가 텔레만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라고 전해진다. 요즘에야 그렇지 않지만 당시 텔레만의 인기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콜레기움 무지쿰은 여름에는 야외의 정원에서, 겨울에는 시내의 커피숍에서 매주 시민들을 위한 음악회를 열었다. 베를린에 커피숍 1호점이 생긴 것은 1721년이었다고 하며, 그 이후 독일 전체에서 커피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바흐도 커피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커피 칸타타]를 썼다. 당시 커피에 열중하던 젊은 아가씨들의 모습을 한탄하면서 딸에게 신랑을 짝지워 줄테니 커피 좀 적당히 마시라는 내용의 가사가 재미있다. 당시에는 커피가 여성의 불임을 유발한다는 오해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바로크 시대 독일에서는 교회에서도, 커피숍에서도 궁정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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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형 / 전 <객석> 편집장, 음악 칼럼니스트
월간 <객석> 편집장 역임, 현재 (재)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거장들의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이 반복되는 삶이 마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다고 생각한다.

이미지 TOPIC / corbis

 

 

원문보기 : http://navercast.naver.com/classical/classicabc/2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