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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은 동구권의 공산 정권들이 연이어 붕괴한 대격변의 해였다. 이 해에 폴란드에서 시작한 민주화 운동은 마치 도미노처럼 순식간에 동유럽 각국으로 퍼져갔고, 이 물결에 재빨리 올라탄 체코는 몇 달간의 숨가쁜 정치적 공방 끝에 민주화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시민 포럼’의 지도자 바츨라프 하벨이 마침내 12월 29일 대통령에 선출됨으로써 혁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대전환의 한가운데에 음악이 있었다. 12월 14일에 프라하의 스메타나 홀에서 하벨이 참석한 가운데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울려 퍼졌던 것이다. 체코 필하모닉의 단원들은 자신들도 적극 지지했던 혁명이 성공한 것을 축하하며 혼신의 힘을 다한 열연을 펼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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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셰흐라트(Vyšehrad) / 주빈 메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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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다우(Vltav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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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카(Šárk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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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의 숲과 초원에서(Z český luhů a háj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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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보르(Táb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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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니크(Blaní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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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까지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음원제공 : 소니뮤직 | |
그리고 그 이듬해, 1990년 5월 12일에 같은 장소에서 스메나타의 [나의 조국]이 연주되었다. 그 해 ‘프라하 5월 음악제’(‘프라하의 봄 음악제’라고도 한다)의 첫 무대였던 이 공연의 지휘를 맡은 인물은 라파엘 쿠벨릭이었다. 그는 당시 76세로, 건강 악화로 인해 객원 지휘만 간간이 하던 상태였으나 이 자리에는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하벨이 초청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1948년에 소련의 사주를 받은 사회주의자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체코의 민주화가 좌절되자 택했던 망명의 세월이 40여 년 이어진 끝에 마침내 다시 돌아온 조국의 무대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 음악제는 바로 쿠벨릭 자신이, 체코 필하모닉 창단 50주년이었던 1946년 당시 상임지휘자로서 창설한 음악제였던 만큼 그 감회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흥분과 감격으로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힘차게 지휘봉을 휘두르는 지휘자와 이를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하벨 대통령의 모습(이 공연 실황을 담은 DVD에서 확인할 수 있다)은 누가 보더라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때 연주된 작품이 [나의 조국] 아닌 다른 곡이었다 해도 그런 가슴 뭉클한 장면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이 곡의 무엇이 지휘자와 연주자, 청중을 하나로 묶은 뜨거운 공감대를 이끌어냈던 것일까?
민족과 자신의 불행을 뜨거운 조국애로 승화시킨 걸작
[나의 조국](Má Vlast)은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연작 교향시로, 1873~1880년에 걸쳐 작곡되었다. 당시 그는 (1866년에 작곡한 오페라 [팔려간 신부]의 대성공 이래) 명실 공히 체코의 국민 작곡가 반열에 올라 있었지만, 이 무렵부터 청력이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어지럼증도 생겼다(결국 그는 1874년 10월경에 청각을 완전히 상실하고 훗날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나야 했는데, 이는 매독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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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체코의 작곡가 스메타나(가운데)
이런 암담한 상황 속에서, 그는 절망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시선을 밖으로 돌려 체코 민족 전체의 고난에 주목했다. 당시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 하에 있었으며, 제국 정부가 특별히 압정을 행한 것은 아니었으나 제국을 구성하는 여러 민족 사이의 알력에서 비교적 소외된 위치에 있었던 체코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특히 강했다. 스메타나는 독일어를 쓰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성인이 된 뒤에는 열렬한 민족주의자가 되었으며, 민족주의적 소재에 기초한 음악(민족주의 음악 )을 다수 작곡했다. 그리고 [나의 조국]은 스메타나의 민족주의적 작품 활동을 총결산하는 작품이자 작곡가의 최고 걸작이다. 그는 이 방대한 연작 교향시에서 체코의 자연과 역사를 능란하고도 애정 어린 필치로 그려냈다. 전곡의 초연은 1882년 11월에 프라하에서 이루어졌으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각 곡의 초연은 그 이전에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다. 각 곡의 제목과 그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1. 비셰흐라트 Vyšehrad 프라하로 흐르는 몰다우 강변에 우뚝 선 체코의 옛 성 이름을 따 지은 곡이다. 두 대의 하프가 네 개의 음으로 된 특징적인 음형을 연주하면서 시작하는데, 이 음형은 비셰흐라트를 상징하며 이후 전곡에 걸쳐 여러 형태로 되풀이된다. 이 주제는 스메타나의 오페라 [리부셰]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으며, 이 오페라가 국민들에게 빛나는 미래를 예언했던 체코의 왕녀 리부셰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는 점과 그녀의 거성(居城)이 바로 비셰흐라트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결국 비셰흐라트의 주제는 성 자체뿐만 아니라 체코 민족, 그리고 조국의 자유와 영광에 대한 작곡가의 염원 모두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곡가 자신은 이 곡에 대해 ‘조국의 영광이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면, 시인은 조국의 여름에 보이는 찬란한 광경, 전쟁, 마지막으로 조국의 몰락을 노래한다’고 말했다고 하며, 이 말은 곡의 광대하면서도 신비로운 시작과 영웅적인 클라이맥스, 차분한 결말로 이어지는 구성에 그대로 들어맞고 있다. 1874년 9~11월에 작곡되어 1875년 3월에 초연되었으며, 처음부터 반응이 좋아 자주 연주되었다.
2. 몰다우 Vltava 몰다우는 프라하 시내로 흘러드는 강 이름으로, 체코어로는 ‘블타바’로 부른다. 사실 ‘몰다우’는 독일어 지명이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치하의 체코에서 이 곡을 작곡했던 스메타나에게는 불쾌한 이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곡은 전체 여섯 곡 가운데서도 독일-오스트리아 교향시 전통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몰다우는 남부 보헤미아의 작은 샘에서 발원해(곡 첫머리의 플루트 악구) 다른 냇물(클라리넷)과 합치면서 어엿한 강으로 불어나 도도하게 흘러간다(이를 묘사하는 현의 유려한 선율은 그 자체로 몰다우 전체를 상징한다). 이 강은 사냥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숲(사냥 나팔을 묘사한 호른 악구)과 혼례가 벌어지고 있는 시골 들판(폴카 리듬을 지닌 흥겨운 악구)을 지나 흘러가며, 밤이 되면 체코 전설에 나오는 물의 요정들이 강변에서 달빛을 받으며 춤을 춘다. 이 대목은 현과 하프를 중심으로 한 신비로운 악구로 묘사된다. 악상은 이윽고 성 요한의 급류에 도달해 격하게 휘몰아치고, ‘몰다우의 주제’가 다시 의기양양하게 연주된 다음 비셰흐라트의 주제가 장엄하게 울리는 가운데 힘차게 끝을 맺는다. 1874년 11~12년에 작곡되어 1880년 4월에 초연된 이 곡은, 처음에는 ‘비셰흐라트’만큼 반응이 좋지는 않았으나 곧 인기를 끌기 시작해 이제는 전곡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단독으로도 자주 연주되는 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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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시내를 흐르는 몰다우 강 풍경
3. 샤르카 Šárka 이제 이야기는 전설의 세계로 옮아간다. 연인에게서 버림받았기에 세상의 모든 남성에게 복수하기로 다짐하고 다른 여전사들과 함께 숲에 숨어든 샤르카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격렬한 첫머리에 이어 남자 전사들의 도착을 알리는 악구로 넘어간다. 나무에 묶인 샤르카를 발견한 남자들은 이것이 계략인 줄 모르고 그녀를 풀어준다. 샤르카와 다른 여인들에게서 감사를 받으며 대접을 받은 남자들은 술에 섞인 약 때문에 곧 곯아떨어지고, 샤르카가 나팔을 불자 여인들은 남자들을 무참하게 베어버리고 만다. 이 곡은 1877년 5월에 초연되었다.
4. 보헤미아의 숲과 초원에서 Z český luhů a hájů 피비린내 나는 복수와 살육의 이야기는 보헤미아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의해 정화된다. 큰 스케일로 굽이치는 첫머리 악구는 드넓게 펼쳐진 체코의 숲과 평원을 바라볼 때의 인상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어 새의 노래와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나무가 멀리서 울리는, 자연 자체를 상징하는 호른의 고적하고도 풍부한 음향과 뒤섞인다. 폴카 리듬의 민속적인 악구를 거친 다음 모든 주제가 한데 어우러져 밝고 명랑하게 마무리된다. 초연은 1876년 2월에 이루어졌다.
5. 타보르 Tábor 이 곡과 다음 곡은 음악적인 면에서나 주제 면에서나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타보르(‘야영지’라는 뜻을 지녔다)는 보헤미아 남부의 도시로, 후스 교파(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 가톨릭 교회를 변혁하고자 했던 얀 후스의 추종자들)가 본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이 곡의 주축을 이루는 악상은 후스 교파의 성가 ‘너희 주님의 전사들아’에서 따온 것으로, 이 굳세고 힘찬 선율은 여러 체코 작곡가의 작품에서 조국의 정체성의 상징으로, 그리고 정치적․사상적 압박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음악은 전쟁 전의 긴장감에서 시작해 전투와 승리, 흥망성쇠를 그려내는 가운데 후스 교파의 신앙심과 위엄도 함께 묘사하고 있다. 곡 말미에 성가 주제가 완전한 형태로 당당하게 제시되기는 하지만, 결말 자체는 불확실하게 열린 형태로 남는다.
6. 블라니크 Blaník ‘타보르’의 마지막 대목이 제기하는 모호한 의문은 ‘블라니크’의 힘찬 첫머리에서 해소된다. 후스 교파의 전사들은 결정적인 패배를 겪은 뒤 블라니크의 산중에 숨어들어, 보헤미아에 다시 영광을 가져오기 위해 부름을 받을 마지막 날까지 잠든 채 누워 있다. ‘타보르’에 등장했던 성가 주제가 여기서 다시 되풀이되면서 전사들의 질주를 묘사한 뒤 감동적인 간주 악구로 이어진다. 세월이 흘러 양치기가 피리를 불 때 산중에 누운 전사들의 탄식이 멀리서 메아리처럼 울리고, 이윽고 악상은 다시 힘을 얻어 비셰흐라트의 주제와 후스 교파의 성가 주제가 어우러지면서 힘차게 끝을 맺는다. 이 곡은 1880년 1월에 초연되었다.
‘프라하의 봄’과 압제에 대한 저항정신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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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봄’ 음악제는 매년 스메타나의 기일인 5월 12일에 열리며, 개막곡은 언제나 [나의 조국]으로 정해져 있다. 이 음악제는, 창설자가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등진 뒤에도 변함없이 남아 체코 현대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함께했다. 아마도 쿠벨릭은 처음 음악제의 이름을 지었을 때 그 이름이 자신이 의도했던 차원을 넘어선 의미를 지니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프라하의 봄’이라는 말이 대개는 음악제보다도 소련이 투입한 바르샤바 동맹군의 20만 병력에 무참히 짓밟힌 1968년의 민주화 시도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니 말이다. 그리고 쿠벨릭은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마침내 실현된, 그리고 앞으로 사라지지 않을 ‘프라하의 봄’을 맞이한 조국에 되돌아와 압제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던 [나의 조국]을 지휘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이에게 그 음악이 지니는 메시지는 명백한 것이었으리라. ‘우리는 뼛속까지 체코 사람이며, 조국의 영광과 빛나는 미래를 위해 함께 싸워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자각. 아마도 체코 사람들은 해마다 5월이 오면 프라하를 뒤덮은 아름다운 신록 속에서 [나의 조국]을 들으면서 이와 같은 자각을 새삼 되새겨갈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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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5월 12일 ‘프라하의 봄’ 거리로 쏟아져 나온 체코 청년들 | |
추천음반 본문에서 언급한 쿠벨릭의 1990년 ‘프라하의 봄’ 개막 공연 실황은 음반(Supraphon)으로도 나와 있지만 DVD(Denon)으로 보는 편이 공연의 감동을 제대로 느끼기에 더 좋다. 이 곡이 체코인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알려면 반드시 보아야 할 영상물이다. 쿠벨릭이 평생에 걸쳐 남긴 많은 녹음 가운데 음악적으로 가장 뛰어난 것으로는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의 1984년 녹음(Orfeo)을 꼽을 수 있다. 같은 체코 지휘자인 바츨라프 노이만은 쿠벨릭에 비해 다소 절제된 해석을 들려주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의 1968년 녹음(Teldec/Berlin Classics)과 체코 필하모닉과의 1975년 녹음(Supraphon) 모두 뛰어나다. 체코 밖의 지휘자 가운데서는 단정하고 명쾌한 해석이 돋보이는 안토니 비트/폴란드 국립 교향악단의 1993~94년 녹음(Naxos)이 특히 돋보인다. | |
- 민족주의 음악
국민주의 음악, 국민악파라고 한다. 민속적 색채와 소재를 반영해 민족 자부심과 전통을 표현하는 음악을 가리킨다. 민족주의 작곡가들은 이탈리아, 독일 음악의 지배적 흐름에서 벗어나 각 나라만의 고유한 어법으로 음악을 창조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민족적 자부심을 고양시키려 했다. 19세기 민족주의 운동이 발흥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러시아 5인조,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체코의 드보르자크, 스메타나, 노르웨이의 그리그 등이 있다.
- 글 황진규 / 음악 칼럼니스트
- 클래식음악 전문지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스트라드>, <인터내셔널 피아노>, <콰이어 앤 오르간>, <코다>, <라 무지카> 등 여러 잡지에 리뷰와 평론, 번역을 기고해 온 음악 칼럼니스트이다. 말러, 브루크너, 쇼스타코비치, 닐센의 음악을 가장 좋아하며, 지휘자 가운데서는 귄터 반트를 특히 존경한다.
이미지 TOPIC / corbis
음원 제공 소니 뮤직
원문보기 : http://navercast.naver.com/classical/masterpiece/2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