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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의 이해

[스크랩] 바로크 음악의 이해 - 비발디, 바흐, 헨델

minjpm 2010. 5. 19. 10:53

이번 글에서는 바로크 음악의 핵심을 좀 더 심도 있게 들여다보기 위해 바로크 음악 작곡가 3총사인 비발디, 바흐, 헨델을 선택, 집중 공략하기로 한다. 음악사조를 내용으로 하기에 왠지 글이 딱딱해지는 감이 없지 않다. 바로크 음악을 설명하는 글의 마지막이자 세 번째 글은 윤동주 시인의 시를 패러디하여 시작해 보도록 하자.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바로크 음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바로크 음악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바로크 작곡가들이 많은 까닭이요,
다음 고전파 음악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발매된 음반을 다 듣지 못한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비발디와
별 하나에 바흐와
별 하나에 헨델과
별 하나에 모음곡과
별 하나에 협주곡과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카치니, 몬테베르디, 프레스코발디, 코렐리, 알비노니, 스카를라티, 타르티니, 페르골레시,
륄리, 쿠프랭, 샤르팡티에, 라모, 퍼셀, 스벨링크, 쉬츠, 북스테후데, 비버, 파헬벨, 텔레만,
이런 작곡가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안토니오 비발디 - 화사한 활기의 음악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는 ‘빨간 머리 신부’라 불렸다. 당시에는 성직자와 세속적인 직업을 겸직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비발디는 1704년부터 1740년까지 베네치아의 피에타 양육원 부속 여자음악학교 에서 지휘자, 작곡가, 선생님, 음악 총감독으로 활약했다.

 

비발디는 49곡의 오페라, 450여 곡의 협주곡, 23곡의 신포니아 75곡의 독주 또는 트리오 소나타, 다수의 칸타타모테트, 오라토리오를 작곡했다. 비발디가 오페라를 작곡하고 있던 1713년~1739년 경 그의  작품은 동시대의 다른 어떤 작곡가들 - 스카를라티, 로티, 가스파리니, 알비노니, 폴라놀로, 칼다라, 헨델 등 - 의 작품보다 더 많이 무대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메조 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의 장기이자, 최근에 조수미의 바로크 앨범에도 수록돼 있는 아리아 ‘두 줄기 바람이 몰아치고’가 수록된 오페라 [그리셀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발디 오페라의 매력은 상당하다. 아직까지 그 봉인을 따는 작업이 행해지고 있다고 봐도 좋다. 비발디 오페라는 현재 진행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발디는 협주곡의 작곡가다. 17세기 말 코렐리의 합주 협주곡 양식을 넘어서는 비발디 협주곡의 2/3 가량은 독주 악기를 위한 협주곡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빠른-느린-빠른의 3악장 형식으로 되어 있고 유명한 [화성과 창의의 시도] 중 [사계]는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의 선구격인 묘사적 관현악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음악가 안토니오 비발디

 

12개의 협주곡을 담고 있는 [조화의 영감]은 유명도에 있어서는 [사계]보다 떨어지지만 들을수록 그 맛이 우러나는 비발디 최고의 걸작이다. 1712년 네덜란드에서 출판되어 비발디의 명성이 국제적이었음을 입증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곡은 독일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비발디 [10번 B단조 협주곡]을 [4대의 쳄발로를 위한 협주곡 BWV 1065]로 편곡하기도 했다. 사실 바흐는 비발디의 협주곡을 10곡이나 복사했으며, [4대의 쳄발로를 위한 협주곡] 외에도 6곡은 쳄발로를 위해, 3곡은 오르간을 위해 편곡했다. ‘협주곡의 작곡가’ 비발디는 바로크 후기에서 고전파 음악 초기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18세기 작곡가들에게 독주와 총주의 대조와 기악적인 음향에 대한 중요성을 심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간결한 주제, 명쾌한 형식, 활기찬 리듬, 악상의 흐름에서 보이는 논리적인 지속성 등은 바흐 이외에도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성실한 질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는 6대에 걸친 음악가 집안 ‘대 바흐’의 가문에서 태어나 성실한 음악가의 삶을 살았다. 아른슈타트와 뮐하우젠에서 오르간 주자로 일했고, 쾨텐 지방 공작의 궁정악장,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칸토르로 취임했다. 바흐는 윗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동료들의 즐거움을 위해, 신의 영광을 위해 늘 최선을 다했다. 바흐는 장인으로서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힘들게 악보를 사보하면서 모든 음악적 원천을 소화했다. 그리고 개인과 교회, 시 당국이 후원한 18세기식 예술후원 체제를 등에 업고 ‘하나의 우주’에 가까웠던 천재성을 발휘하며 ‘대 바흐’의 명성을 이루어 내었다.

 

바흐는 오페라를 제외한 바로크 후기의 전 장르에서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그는 주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요구하는 필요성에 따라 작곡했기 때문에 상황과 시대에 따라 작품을 분류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르가니스트로 고용됐던 아른슈타트, 뮐하우젠, 바이마르에서 쓴 작품의 대부분은 오르간을 위한 것이었다.

 

아른슈타트 시절 바흐는 거장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연주를 보기 위해 예정된 4주간의 뤼벡 여행을 16주로 연장하기도 했다. 유명한 [토카타와 푸가 D 단조]는 북스테후데의 작풍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뮐하우젠 시절 바흐는 [그리스도는 죽음의 포로가 되어도] 등 초기 교회 칸타타의 명작을 썼으며, 바이마르 시절에는 [오라 성령이여 주 하느님이여에 의한 환상곡]같은 대규모 코랄 편곡이나 [오르겔뷰흐라인(오르간 소곡집)], 바이센펠스의 영주 크리스티안 공의 생일을 축하하여 작곡한 사냥 칸타타 [나의 즐거움은 힘이 나는 사냥뿐] 등을 썼다.


바흐는 중세 이래 서양음악을 집대성해 서양 고전음악의 토대를 마련했다.

 

마찬가지로 바흐가 교회음악과 관련이 없었던 쾨텐 시절 쓴 곡들은 교육용과 가정 오락, 궁정의 여흥을 위한 음악인 클라비어나 기악 합주용 음악이었다. 걸작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 모음곡],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등이 이 시절 나왔다. 바흐가 칸타타와 그 밖의 교육 음악을 주로 많이 쓸 수 있었던 시기는 라이프치히에서의 초창기였다. [요한 수난곡], [마태 수난곡],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커피 칸타타], [쳄발로 협주곡], [관현악 모음곡], [골드베르크 변주곡], [푸가의 기법], [음악의 헌정], [B단조 미사] 등 깊이 있는 빼어난 작품들이 만년에 나왔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중세 이래 서양의 음악문화를 집대성했다. 서양 고전음악의 근간인 대위법은 곧 바흐의 음악을 의미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또한 바흐는 비발디를 비롯한 전세대와 동세대 음악에서 취할 것을 취하고, 카를 필립 에마누엘, 요한 크리스티안 등 뛰어난 작곡가가 된 아들들과 제자를 양성해 그의 예술을 성실하게 다음 세대로 전달했다. 나는 바흐를 생각하면 수없이 많은 톱니바퀴가 정확히 작동하며 돌아가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시계가 떠오른다. 바로크 시대 비발디는 이탈리아의 진보적인 음악을 대표하고 있었고, 장 필립 라모 등 프랑스 바로크 작곡가는 루이 14세 시대 이후 프랑스의 전통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바흐는 이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음악적 업적을 흡수해 자신의 북독일 루터파의 자질과 융합시켜 강하고 독특한 개성의 연합을 이뤄냈다.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 글로벌 스타

헨델은 완전히 글로벌 스타 작곡가였다. 헨델의 음악은 독일적인 중후함과 이탈리아적인 명쾌함, 프랑스적인 장려함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마치 근대 이후의 홍콩과도 같은 국가적 색채의 완충지대였고, 국가적인 양식을 넘는 헨델의 특성을 발전시키는 데 최적의 땅이었다. 영국은 헨델에게 멍석을 깔아주었다. 자신들의 합창 전통을 개방하여 오라토리오를 쓸 수 있도록 장려했다. 바로크 시대 비발디가 끼친 영향은 동시대적이었으나, 상대적으로 라모의 영향은 오페라와 음악이론 부분에 한정됐으며, 바흐의 작품은 나중에 멘델스존에 의해 붐이 일기 전까지 반세기 동안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헨델은 바흐와 달랐다. 당대에 국제적으로 명성을 날렸고 그 명성은 쉬 사그러들지 않았다.

헨델은 음악가족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이 뛰어난 나머지 마지못해 음악을 시켰다. 고향인 작센의 할레에서 오르간 주자, 쳄발로 주자가 된 헨델은 바이올린, 오보에를 배우고 대위법의 기초를 철저히 익혔으며, 독일 작곡가와 이탈리아 작곡가의 악보를 필사하며 감각을 키웠다. 바흐와 달리 오페라에 마음이 기울었던 헨델은 독일 오페라의 중심지 함부르크에서 음악가 요한 마테존 등과 교류하며 최초의 오페라 [알미라]를 썼다.

 

1706년부터 1710년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렀던 헨델은 로마, 피렌체, 나폴리, 베네치아의 주요 후원자들, 음악가들과 사귀었다. 당대의 음악가 코렐리,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와 교류하며 [아그리피나] 등의 오페라를 썼다. 1710년 런던을 방문한 헨델은 그곳에서 아리아 ‘울게 하소서’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오페라 [리날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헨델은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으로 건너가 큰 성공을 거둔 음악가다.

 

영국에서의 성공에 고무되어 독일 하노버 선제후(헨델은 1710년부터 선제후의 악장으로 근무했었다)에게 돌아가지 않았던 헨델은 자신이 의리를 저버렸던 그 선제후가 영국 왕위(조지 1세)에 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즈음 헨델이 조지 1세의 환심을 사기 위해 템즈 강 뱃놀이를 위해 ‘맞춤형’으로 작곡한 곡이 [수상음악]이다. 헨델의 기악 작품 중에 중요한 것으로는 이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 [합주 협주곡 Op.3]과 [Op.6], [오르간 협주곡 Op.4]와 [Op.7]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밖에 쳄발로 모음곡(유명한 [즐거운 대장간]은 이 곡의 1권 5번의 선율을 변주한 것이다)과 트리오 소나타 등을 들 수 있다.

 

런던에서 헨델은 [줄리오 체사레], [로델린다] 등 뛰어난 오페라를 작곡하며,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오를란도], [알치나], [세르세] 등의 명작 오페라를 낳을 즈음, 영국의 오페라계는 매서운 구조조정의 칼바람 속에 있었다. 오페라의 고비용 저효율에 근심하던 헨델은 영어 가사로 된 오라토리오 장르로 선회했다. 오라토리오는 오페라보다 제작비용이 훨씬 적게 들었다. 게다가 당시 영향력 있던 중산계급 음악 애호가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이탈리아 오페라보다 영어로 된 오라토리오를 선호했다. [아치스와 갈라테아], [에스더], [알렉산더의 향연], [사울], [이집트의 이스라엘인]등 영어 가사를 붙인 오라토리오에 이어, 1742년 헨델의 대표작 [메시아]가 더블린에서 연주되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신화를 소재로 한 [세멜레], 성서의 내용을 가사로 한 [유다스 마카베우스] ,[예프타] 등도 연이어 히트를 쳤다.


1726년 헨델은 영국인으로 귀화했다. 그는 이미 사랑받는 영국인이었다. 장년기를 모두 런던에서 보냈고, 그를 대표하는 작품들은 모두 영국의 청중들을 위해 썼기 때문이다. 헨델은 바로크 후기 음악을 보급하는 데 공헌했고, 18세기 중기의 새로운 양식에서 중요한 요소들을 시대에 앞서서 사용했다. 대규모 양식의 합창곡에 있어서 헨델에 필적할 사람은 없다. 바흐의 대위법 양식이 엄격했다면 헨델은 멜로디와 화성에 중점을 두었다. 오라토리오를 통해 중산층 계급에게 호소한 것은 음악 분야에 영향을 미친 사회적인 변화에 대응하는 헨델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의미로 헨델은 고전을 넘어 멀리 낭만 음악을 바라본 선구자였다.

 

 

원문보기 : http://navercast.naver.com/classical/classicabc/2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