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유시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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훤칠한 외모에 비올을 연주하며 부르는 남자의 눈매가 다정하다. 노래의 가사는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사모의 감정이었다. 노래를 들으며 귀족 여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이 남자는 트루바두르 (troubadour)라 불리는 음유시인이다. 트루바두르는 신분도 높은 귀족이면서 싸움터에서는 용맹한 기사이기도 해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시와 선율이 모두 뛰어난 ‘싱어송라이터’였다. 트루바두르는 1년 내내 귀족들의 성에서 성으로 옮겨 다니며 여행했다. 성에 도착하면 먼저 세치 혀의 화술로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주인에게 자신을 알렸다. 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노래를 선보였다고 하니, 트루바두르는 노래와 시, 재치, 화술로 무장한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셈이다. 트루바두르가 부르는 가사의 내용은 보통 사랑과 모험이었다. 신분 높은 귀부인에 대한 궁정 연애와 기사도의 모험이다. 간혹 노래에 감동한 귀부인으로부터 이마에 키스를 받기도 했는데, 이를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다음의 여정으로 떠났다 한다. 십자군 원정이 계속되던 시기라 기사도 정신 역시 인기 있는 이야기였다. 대표적인 기사문학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도 트루바두르를 통해 퍼져 나갔다.
프랑스 남부에서 만들어진 트루바두르의 전통은 루아르 강을 경계로 한 북부지방에서는 트루베르로 발달했다. 북쪽 독일어권의 도나우 강 유역에 퍼진 이후로는 독일의 음유시인 미네쟁어와 노래하는 수공업자인 마이스터징어로 나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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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초 독일 마인츠에서 구두 장인과 양복 수공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이 가장 오래된 노래 학교를 설립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조합이었다. 엄격한 시험을 거쳐 작사, 작곡, 노래가 가능한 사람을 키웠다. 모든 시험에 통과하면 마이스터징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징어’는 싱어(singer) 즉 가수를 뜻한다. 바그너의 악극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주인공 한스 작스는 뉘른베르크의 구두공으로 16세기 활약했던 실재 인물이다. 13세기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가 기사 계급의 몰락과 더불어 스러져갔고, 미네징어도 15세기 이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마이스터징어만이 17세기까지 그 전통을 계속 이어갔다.
르네상스 시대의 여명
르네상스란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시작해서 전 유럽으로 퍼진 혁신의 기운을 일컫는 말이다. 모든 것을 신 중심으로 생각하던 중세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재인식하고 고전 문화예술의 부흥을 외치게 된 것이 르네상스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갈릴레이의 아버지는 류트 연주가이자 작곡가였다)의 지동설은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었다. 신과 유럽이 유일한 세상의 중심임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사람들이 유럽 이외에도 대륙이 존재하고 둥근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패러다임의 전환이며 가치관의 대전환이었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 역시 ‘IT혁명’이었다. 15세기 중반 인쇄술의 발달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성서를 일반 시민들에게도 가져다주었다. 오늘날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이 IT 혁명이라 일컬어지듯이 인쇄 출판에 의한 성서의 보급은 종교개혁을 촉발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폐해가 알려졌으며, 프로테스탄트의 여러 종파를 탄생시켰다. 음악계에서 활판 인쇄가 처음 사용된 곳은 베네치아였다. 1501년 악보 출판업자 페트루치가 최초로 악보를 활판 인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악보집에는 당시 인기 높던 플랑드르 악파(벨기에에서 프랑스 북단에 걸친 플랑드르 지방 출신의 음악가)의 샹송이 들어있고, 르네상스 최대의 거장이라 불리는 조스캥 데 프레(1450~1521)의 작품도 들어있다. 활판 인쇄에 의한 학보의 출판으로 새로 만들어진 음악을 신속하고 저렴한 가격으로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음악이 연주되는 장소 역시 교회와 대성당을 넘어서 궁정이나 귀족의 자택 등으로 분화되었다.
르네상스 작곡가 3인방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 그림이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처럼 지금까지도 널리 향유되고 있는 르네상스 음악가를 찾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중 가장 높이 평가 받는 작곡가로는 위에 언급한 조스캥 데 프레를 꼽을 수 있다. 플랑드르 지방에서 태어나 밀라노에서 합창단원으로 활약했고 추기경 밑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고 로마 교황청 예배당에 들어가 성가를 지휘했다. 동시대 음악인들로부터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며 존경을 받았고 16세기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도 “다른 작곡가들은 음에 지배당하지만 조스캥만은 음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 |
동시대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조스캥 데 프레도 돌림노래 같은 모방 양식을 많이 사용했지만, 하나의 멜로디가 한 마디 혹은 두 마디 정도 늦게 다른 멜로디에서 나오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기법을 통해 노래가 시작하는 부분의 가사 내용을 듣는 사람들이 보다 더 잘 알아들을 수 있게 했다. 즉, 음악 자체가 명확성을 갖게 된 것이다. 조스캥에 의해서 베이스 선율과 하모니가 보다 발전하기도 했다. 수퍼리우스, 알투스, 테너, 베이서스 등 합창단의 배치는 오늘날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와 유사하며, 오늘날까지 합창단의 기본적인 구분으로 통용되고 있다. 조스캥 데프레는 밀라노에서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 밑에서 일할 때 [돈이 없는 것은]이란 샹송을 작곡했다. 또 그의 미사곡인 [라솔파레미]는 ‘밀린 급료를 달라(Lascia fare a me)'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어찌 보면 베트남 전쟁 때 밥 딜런과 조운 바에즈가 불렀던 반전 포크음악을 연상케 한다. 1501년에 프랑스 궁정에서 작곡한 [왕을 위한 노래]는 조스캥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루이 12세의 요청에 의해 만든 곡인데, 왕이 노래하는 테너 성부는 움직임이 거의 없는 멜로디로 썼다. 왕의 노래 솜씨가 그저 그랬다는 걸 요즘도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 |
조스캥 데 프레에 이어서 알아두어야 할 르네상스 작곡가로는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팔레스트리나(1525~1594)가 있다. 팔레스트리나는 태어난 지명이고, 본명이 피에를루이지라 한다. 어릴 적부터 목소리가 아름다웠던 팔레스트리나는 12세 때 성가대에서 노래를 하다가 교황 율리우스 3세에게 발탁돼 산피에트로 대성당 줄리아 예배당의 악장으로 임명됐다. 1555년 30세때 팔레스트리나는 영예로운 교황 예배당 가수가 됐다. 그러나 2개월 뒤 율리우스 3세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서 교황이 된 마르체르스 2세도 즉위 3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은 교황 파울루스 4세는 그를 해고했는데, 이유는 성직자가 결혼을 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후 여러 교회의 악장과 음악교사를 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에 들어간 팔레스트리나는 1571년 교회 예배당으로 복귀했다. 빈의 황제를 포함한 수많은 궁정의 요청을 다 거절하고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23년간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떠나지 않았다 한다. 유유히 흐르는 듯한 멜로디와 안정된 울림을 가진 교회음악은 ‘팔레스트리나 양식’이라고 해서 이상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팔레스트리나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곡을 썼고 현재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을 그레고리오 성가에 버금가는 모범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들 가운데 카를로 제수알도(1566~1613)의 삶은 가장 드라마틱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널리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제수알도는 명문 귀족 출신이었다. 제수알도 지방의 15대 영주이며 베노사 공국의 대공이기도 했다. 그의 숙부는 카를로 보로메오 추기경이었고 어머니는 교황 비오 4세의 조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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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교회 권력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제수알도는 차남이었기에 성직자의 길을 걸어야 했지만, 형이 사고로 급사하고 아버지도 돌아가시자 18세에 베노사 공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명문가의 혈통을 잇기 위해 20세 안팎에 결혼을 하게 됐는데, 신부는 사촌누이인 마리아 다발로스였다. 여섯 살 연상, 두 번 결혼에 자식도 있었지만 나폴리 제일의 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둘 사이에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음악을 좋아하고 조용한 성격의 제수알도와 나폴리 궁정에서 분방하게 성장한 마리아의 성격은 사뭇 달랐다. 결혼 2년 만에 마리아는 파브리지오 카라파와 몰래 사귀기 시작했다. 1590년 10월 제수알도는 사냥을 가는 척하고 집을 나섰다가 산세베로 궁전에서 밀회를 나누는 둘을 붙잡아 죽이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시신을 궁에다가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평생 죄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제수알도는 자신의 마드리갈에 격한 감정과 죄책감을 실었다. 반음계적인 급격한 화성을 지닌 느린 부분과 온음계적인 빠른 부분이 교차하는 그의 스타일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대담한 것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한 성악곡 마드리갈
마드리갈은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한 성악곡의 양식으로 다성의 세속 가곡이다. 모테트의 세속적인 측면이라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마드리갈은 라틴어로만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들로 씌어졌다. 모테트에 비해 표현의 자유도 늘어나 감상주의적인, 때로는 관능적인 것들을 주제로 다루기도 했다. 마드리갈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학자들이나 예술가들의 모임에서 연주되었고, 대중적인 음악이었으며, 현재까지 전해지는 곡의 숫자도 매우 많다. 마드리갈은 류트나 하프시코드 반주가 붙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마드리갈 양식은 루카 마렌치오같은 대표적인 작곡가들을 낳았다. 16세기 중반에 다른 나라로 퍼져나가 이 무렵에야 비로소 영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영국의 마드리갈은 멜로디가 부르기 쉽고 가사가 심각하지 않고 즐거운 면이 강조된 특성으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영국 최초의 마드리갈 작곡가 토마스 몰리의 작품 등이 잘 알려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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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류태형 / 전 <객석> 편집장, 음악 칼럼니스트
- 월간 <객석> 편집장 역임, 현재 (재)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신윤주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KBS 클래식 FM [출발 FM과 함께] 중 '류태형의 출발 퀴즈' 코너를 통해 매일 아침 8시 출근길 청취자들과 만남을 갖는다. 거장들의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이 반복되는 삶이 마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다고 생각한다.
이미지 TOPIC / corb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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